[Re:start] 변태처럼 내가 사랑스러운 시간

글쓰기

by 소소라미

퇴사 일자를 콱 박아놓고 "D-180 졸업 일기"라는 유치 찬란한 이름으로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사실 글쓰기는 올해 초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마음에 와닿는 문구를 노트에 끄적대는 걸로 시작한 적이 있지만 3일을 가지 못했다. 한참 후에 다시 한판 쓰고 또 묻어뒀다. 그렇게 쓰다만 일기장이 되어버렸다.


이후 핸드폰 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바꿔봤으나 이 또한 지속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읽는 사람일 뿐 쓰는 사람은 못 된다고 생각해 버렸다.


사람은 뭔가 드라마틱하게 환경이 바뀌어야 움직이는 건가? 180일이라는 날짜를 훅 정해두고 나니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아니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에 정리가 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혹시 내가 "빡쳐서" 즉흥적으로 퇴사하겠다고 뱉어 버린 건 아닌지(물론 가족만 알고 있지만), 이러다 시간에 무뎌지며 "뻔뻔하게도" 이제 좀 살만하니 다닐 만하다고 말하는 습관성 퇴사병은 아닌 건지도 알고 싶었다.


D-180일부터, 퇴사 선언과 함께 직속 상사에 대한 욕을 시작으로 블로그에 공개 글쓰기를 시작했다(다행히 3일이 몇곱절은 더 지나서 계속하고 있다)


"네가 다 해 먹으세요!"라고 소리치고 나와버리고 싶었지만 진짜 퇴사는 그렇게 무책임하면 안 된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을 통장을 보고 나니 정신이 현실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화났을 때 깽판 치고 나와야 되는데, 왜 갑자기 이성이 돌아온 거냐. 분노 게이지는 이미 임계점 돌파해버렸는데 퇴사 하나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젠장젠장.


진짜 욕뿐이네.


다음 날에는 4명의 상사 중 한 명이 보고서를 계속 수정하라며 저녁까지 날 붙잡아 두었다. 본인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100번 1000번 고치라 한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퇴근하시란다. 하지만 난 퇴근할 수 없었다. 그 날 안에 마쳐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일기에도 욕만 써댔다.


그 후로도 며칠간 글 욕은 계속되었고, 퇴사 결심이 "진짜"라는 걸 알았다. 글을 쓰다가 솔직한 내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글쓰기의 선순환 매직


글쓰기에 대한 식견과 생각만으로 한 권의 책을 엮어내는 전문가들도 많은 세상에서, 이제 몇 달 안된 햇병아리가 글쓰기에 대한 단상을 써 내려가다니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다.


하지만 왕초보에게는 초보가, 왕왕초보에게는 왕초보가 최고의 멘토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3 수험생에게 최고의 선생님은 이제 막 고3 딱지를 떼 버린 대학생 새내기이듯. 나는 글쓰기 왕초보이니 왕왕초보인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망상스러운 가정 하에 좀 더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를 해볼까 한다.


글쓰기는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 중의 하나로, 많은 전문가들은 삶을 바꾸고 싶다면 하루에 한 줄이라도 글을 써보라고 권한다. 한 줄은 너무나도 쉽다. 당장 할 수 있을 것 같고 의지가 막 샘솟는다.

그런데요. "오늘도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라고 쓰면 안 되는 거죠? 그럼, 뭘 써야 할까요? "문득 올려다본 가을 하늘이 예쁘다. 길을 걷다 보니 들꽃이 나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이라고 써야 할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어떤 이는 감사 일기를 쓰라고, 또는 작은 사물에 대한 소박한 단상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감히 "필요하다면, 욕부터 써 보세요"라고 말해줄 것 같다. 세상에는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고 소소한 행복거리도 많은 만큼 그 마음으로 힘을 내면 좋겠지만, 삶을 바꾸고 싶어서 글을 쓰겠다는 건 지금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 아닐까? 이대로 살기 싫은 사람에게 자꾸 감사하라고만 하면 3일도 안 갈 것 같다. 글쓰기는 종교가 아니야.


나 역시 그랬다. 책이나 영상에서 발견한 동기부여 문장, 아름다운 글귀를 적다 보니 아직은 이 문장들을 소화시켜 피와 살을 만들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글쓰기에 실패했다.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회사를 향한 마음이 더 극단적으로 치닫기도 했지만, 이 응어리를 털어내야 감사라는 마음도 들 것 같았다. 그래서 글로 다 쏟아냈다.


참 신기한 것은 욕도 하도 하다 보니 이내 싫증이 나더라는 거다. 변덕스러운 성격 탓인지 쓰면 쓸 수록 욕만 하는 상황이 지겨워졌다. 왜 귀한 내 시간을 과거로 흘러갈 사람을 생각하는 데 쓰고 있는 거지?라는 현실 자각이 왔다. 그때부터 다시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감사할 준비가 되었니? 아님 다른 것을 생각해볼래? 음 아직 감사한 마음은 모르겠고, 그냥 내 마음을 더 알고 싶어.


글을 쓰다 보니 마리아나 해구까지 들어갈 기세로 더욱 깊숙한 곳의 나를 만나게 되었다.


직장인의 길을 선택했고 중간에 안주하는 삶도 있었지만 그래도 인정 받고 싶었던 나, 하지만 이제는 그저 버티는 직장인이 되어버린 나, 이렇게 버티다가 버려질 시간과 자유를 생각하면 인생이 더 불행해질 것 같아서 그만 졸업하기로 한 나를 마주했다. 비록 인생을 지탱해주던 직장을 포기한 사람이지만 인생에서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용기가 안 나니 도와달라고 글을 통해 발버둥을 쳤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굉장한 용기라는 거 알고 있니? 이제 글로 쓴 걸 직접 경험해보면 더 큰 용기가 날 거야. 부담은 갖지 말고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좋아했던 거, 혹은 호기심은 있었는데 미뤄놓은 거에 하나씩 도전하다 보면 조금이나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내 글은 방구석 포기녀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했고, 마침표들로만 이루어져 있던 D-180 졸업 일기는 [Re:start] 시작 일기 바뀌었다. 흩어진 마침표들을 하나로 이으니 출발선이 된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고 느낀 것들을 글로 남겼고, 글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글을 쓰면서 때론 울컥하고 때론 히죽거리며 나를 만나는 내가 사랑스러워졌다. 변태처럼.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갖게 된 지금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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