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따박따박 옷 쇼핑에 바쳐왔다. 마치 "이 돈을 제물로 바칠 테니 예쁜 옷을 사 입고 스트레스를 풀게 해 주소서."라는 의식과도 같았다. 직장 일로 빡치는 날 퇴근길에는 여지없이 쇼핑 앱을 열어 마음에 드는 옷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쇼핑 앱을 켜는 것이었으니, 무의식적 습관에 가까웠다.
결제하는 순간의 쾌감이 좋았고, 내가 이 정도는 나한테 투자할 수 있다는 원인 모를 오만함까지 느껴졌다. 근무 중 받은 택배 도착 메시지에 얼른 입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다음 날 바로 새 옷을 입고 출근했고, 왠지 더 나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만사가 귀찮아진 번아웃 이후, 옷에 대한 욕망은 한층 커졌다. 머리가 복잡할 때 기분을 좋게 하는 마법이었고, 나한테 어울리는지 내 옷장의 옷들과 매치가 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새 옷이라는 짝사랑의 대상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었다.
옷을 자꾸 사대니 옷걸이가 모자라고 옷장은 당장이라도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남편용 옷장 구석의 빈 공간을 빌려 쓰거나, 옷걸이에 2~3벌씩 겹쳐서 걸었다. 틈새 공간에 쌓아두기도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매번 입을 옷은 없었다. 옷이 여기저기 쌓여 있으니 아침에 옷을 찾는 것도 일이었고, 너무 많으니 뭘 입을까 고민하다 지각 위기 처하기도 했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구매한 옷들이 부메랑이 되어머리를 삼켜버린 것이다.
옷장이 터지니 정신을 차렸다.
여름이 시작되는 무렵이었다. 찾고 있는 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옷은 망쳐버린 시험지처럼 구겨져 있었다. 결국 아무거나 입고 나갔다. 옷 소재도 마음에 안 드는 데다, 바지 길이가 신발이랑 안 맞아서 서로 충돌이 나니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고 기분이 언짢았다. 퇴근하고 오자마자 옷장 문을 열었다. 내가 찾던 옷은 세 겹으로 겹쳐서 걸린 옷들 사이에 있었다.
얘네들, 다 거적때기였어.
내 물건조차 이렇게 방치하면서 나를 통제하려는 타인들 때문에 힘들다고 징징대는 내가 한심해졌다. 통제력을 잃었던 내 과거와 책임지지 않는 현재에 혼구녕을 낼 차례였다. 나의 민낯을 만나야 했다.
사지 않기로 해.
그날 이후로 쇼핑을 멈췄다. 의지박약이라는 나의 캐릭터를 고려해 환경설정도 바꾸었다. 패션 유튜버 채널은 끊었고 쇼핑앱은 삭제했다. 옷 사고 싶을 때 하루 더 생각하고 그래도 사고 싶을 땐 책을 샀다. 옷걸이를 더 사서 하나씩만 걸고, 옷장 바닥에 누워 있는 것들까지 모조리 다 옷걸이에 걸었다. 옷들 사이 공간이 더 빡빡해지자 숨이 턱 막혔다.
몇 달 후 퇴사를 결심했다.
매월 같은 날 통장에 어김없이 찍혀 온 월급은 이제 없어진다. 난 이를 월급 해방이라고 호기롭게 표현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유에서 무가 되는 것이다. 돈이 부족해도 살아갈 수 있는 연습이 필요했고, 1순위는 단연 옷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미 옷은 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스스로 멱살을 부여잡고 참고 있는 것이었기에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했다.
아직도 예쁘게 입으며 살고 싶니?
옷을 안 사게 되면서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를 돌이켜봤다. 쇼핑에 할애했던 시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그 밖의 취미 활동을 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굳이 예쁘게 꾸며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옷은 무의식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미 충분한 옷이 있기에 이 안에서 요리조리 조합하면 원하는 스타일은 충분히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캡슐 옷장을 만들어봤다. 계절에 맞는 옷들을 꺼내 가장 자주 쓰는 옷장 칸에 또로록 넣었다. 컬러별 그라데이션도 맞춰 사진도 찍었다. 월이 바뀌어 한번 더 그렇게 옷장을 만들었고 다음 달 옷장을 꾸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또 다른 면에서 애쓰고 있는 내가 애처롭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즐겁고 어깨춤이 절로 나는 작업이다. 스타일리스트나 코디가 된 기분도 들어 꽤나 진지하다. 한 달에 한 번 만들어 두면 이 안에서만 파먹으면 되니, 망한 코디도 없고 옷을 못 찾아서 화딱지 나는 하루도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