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특정 인물과 관련이 없으며, 상상에 기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화요일 10시.
띠리링.
출입 시스템에 모바일 사원증을 타각하는 소리가 들리자 윤 과장은 반사적으로 메신저 창을 내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윤 과장의 책상은 통로 쪽 가장자리로,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데다 등까지 지고 있어 만천하에 노트북 화면이 노출된다. 모두가 꺼리는 최악의 자리 중 하나다.
윤 과장 역시 처음에는 이 자리가 탐탁지 않았지만 지내다 보니 의외로 좋은 점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화장실이 매우 가까우며 9시 땡 출근해도 후딱 들어와 티 안 나게 앉아버리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상사인 한 팀장과 멀리 떨어진 덕에 안쪽 구역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이곳까지 진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직접 연관된 일만 아니라면 고요하고 평화롭게 머물다 퇴근하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게다가 이제는 등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이 섬세해졌다. 반사 신경 역시 좋아진 건지, 메신저 창을 내리는 속도도 제법 빨라진 듯 하다. 곧 마흔을 바라보며 슬슬 노안이 두려워지는 나이에 신체 기능이 뭐라도 좋아진다는 건 꽤나 반가운 일이다.
이 시각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분명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족히 100명은 되는 7층 임직원 중 유난히 당당한 파워 워킹을 자랑하는 인물로, 구두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는 달라지지만 마치 못을 박듯 바닥에 쿵쿵 박히는 특유의 리듬감이 있었다. 가끔 옆 부서 박 실장과 헷갈리곤 하는데 박 실장의 경우 우람한 몸에서 나오는 묵직함이라면, 김 실장에게서는 애써 힘을 주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AI가 그려준 김실장 이미지 김 실장은 곧장 팀장단 회의를 소집했고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회의실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화기애애해 보였다.
옆자리 이 대리가 슬쩍 말을 건넨다.
"실장님 기분 좋으신 일 있나 봐요."
"어머, 이 대리님도 느꼈어요? 나도 아까 실장님 지나가실 때 슬쩍 봤는데 뭔가 상기된 표정이었어."
"안 그래도 요즘 대표님이 김 실장님 예뻐하신다는 소문이 돌던데 임원 회의 때마다 칭찬 많이 받으시는 듯해요."
이 대리, 역시 이 사람은 정보통이다.
11시 반, 회의가 끝나자 실장과 5명의 팀장단은 곧장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다.
"오전 내에 끝내야 할 일이 생겨서 우리 12시 20분으로 약속 시간 옮길 수 있을까? 미안."
윤 과장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다른 사업부 후배 소영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약속 시간을 늦추게 된 건 다 한 팀장 때문이다. 한 팀장은 오늘도 어김 없이 회의 중에 실시간으로 김 실장의 디렉션을 전달하며 ASAP(아삽)이라 했다. 아니 무슨 ASAP이 개 이름인줄 아나?아니 이쯤되면 그녀가 키운다는 강아지 이름이 ASAP일지도 모르겠다.
12시 20분, 후배를 만나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들어갔다.
예약명을 대자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오시길래 취소하신 줄 알고 자리 확보 못했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룸에 다른 일행과 붙어 있는 두 자리 비워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
이제 와서 다른 식당으로 옮길 수는 없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안내받은 자리는 8인용 룸이었고, 6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먼저 들어가 2인용 상을 살짝 옆으로 옮겨서 일행 구분 표시를 해주었다.
"엇. 윤 과장!"
신발을 벗고 뒤따라 들어오는 윤 과장을 가장 먼저 알아본건 한 팀장이었다.
졸지에 합석 아닌 합석을 하게 되자, 윤 과장은 당황과 짜증이 섞인 억지웃음을 짓고는 마주 앉아 토끼 눈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 재빨리 톡을 보냈다.
'망했다. 이제 와서 나갈 수도 없으니 후딱 먹고 일어나자.'
한 팀장 디렉션만 아니었다면 여유롭게 12시에 와서 이들과 떨어져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남의 속도 모르고 김 실장 옆에서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는 그녀가 원망스러워졌다.
말 한마디 하기도 조심스러워서 밥만 먹고 있는 이쪽과 달리 저쪽 테이블에서는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입은 닫고 귀만 열려있으니 들릴 수밖에.
"실장님 오늘 아침 보고 때도 대표님한테 칭찬받으신 거죠?"
옆팀 나 팀장이 애교 섞인 말투로 묻는다.
"에이 뭐, 다 우리 팀장님들 덕분에..."
"어머, 실장님 겸손하기도 하셔라. 이젠 쭉쭉 올라가실 일만 남았네요."
한 팀장도 질세라 한마디 거든다. 이후 진심인지 아첨인지 모를 기쁨조 퍼레이드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윤 과장이 테이블을 흘깃 보니, 그들이 주문한 메뉴는 이 식당에서 제일 비싼 한우 떡갈비 정식인 듯했다. 저들은 11시 반부터 와서 최고가 음식을 희희낙낙 웃으며 법카로 먹는 반면, 자신은 가장 저렴한 호주산 뚝불을 허겁지겁 그것도 대화 한마디 못 한채 꾸역꾸역, 게다가 내돈내산으로 먹고 있는 처지라는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빨리 먹고 나가서 달달한 음료로나마 쓰린 마음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