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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Mar 14. 2024

정치력이 아니라, 생존력입니다만

제 4화 나 팀장

본 이야기는 특정 인물과 관련이 없으며, 상상에 기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한 팀장이 실장실에서 나왔다. 꼬박 1시간 만이었다.


6시가 한참 지난 시각이었지만, 팀장들은 한 팀장의 표정만으로도 지금 중요한 건 퇴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녀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부푼 풍선처럼 터지지 일보 직전이었고, 생명력 넘치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 팀장 쪽이었다.


나 팀장은 이 날 오후 김 실장의 행동과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우선 김 실장은 2시와 4시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 않았다. 괜히 한 번씩 나와서 책상 사잇길을 어슬렁거리며 "일 잘 돼 가요?"라는 답정너식 질문으로 직원들 근태를 확인했을 그가 5시에 딱 한번 화장실에 가는 것 외에는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그날따라 실장실 유리벽 너머로 의자를 아예 창문 쪽으로 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도 했다.


더욱이 그녀는 낮에 김 실장이 식당에서 나올 때 신 팀장에게 "사무실까지 앞장서서 걸어가세요."라고 낮게 읊조리는 말까지 들은 터였다. 김 실장의 입술은 최대한 살짝 움찔거리는 정도였으나 개나 모기에 가까운 10대 청력을 지닌 나 팀장은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었다. 의미를 파악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나 지금 옷에 김칫국물 잔뜩 묻은 거 쪽팔리니까 신 팀장이 최대한 앞에서 가려달라."는 뜻이었을 테니.


나 팀장이 실장실로 들어오자 김 실장은 미간에 힘을 주고는 김칫국물 사건 당시 상황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정전을 이용해 김칫국물을 쏟은 범인이 이 안에 있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아이고, 도대체 누가 그런 나쁜 짓을 했을까요? 제가 다 화가 나네요."


나 팀장의 동정 어린 눈빛은 진심이라 믿을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마치 길에서 넘어져 울기 직전의 아이를 달래는 어미의 표정이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모성애(?)는 김 실장을 우쭈쭈 하는 데에도 성공한 모양인지 그의 미간을 가득 채웠던 내천(川) 자가 조금은 희미해졌다.


"근데요 실장님, 곧 퇴근하셔야 할 텐데 제가 셔츠라도 사다 드릴까요? 2~3분 거리에 마트 있는 거 아시죠?. 거기 2층에 남성복 매장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거기 브랜드가 지금 입고 계신 거에 비하면 퀄리티는 좀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셔야죠."


"역시 나를 생각해 주는 건 나 팀장이네. 그럼 부탁 좀 해도 될까?"


아마도 이날 오후의 첫 미소였으리라. 애도 아닌 애 같은 김 실장은 오른쪽 아래에 박힌 금니가 훤히 보이도록 활짝 웃더니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비록 우회하는 방법이었지만 나 팀장이 김 실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분을 전환시키는 데까지 10분이면 충분했다.                        

                          


중산층 집안의 둘째로 자란 나 팀장은 눈치와 센스를 달고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잘난 자매들 사이에 껴서 살다 보니 잠재력이 폭발한 것인지, 기분이나 분위기를 살피고 센스 있게 대처하는 능력 하나만은 기가 막혔다. 위아래로 눈치 보고 깨지고 박살 나느라 전쟁을 치르고 사는 동료들의 저편엔 얄미울 정도로 평화로운 그녀가 있었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제일 쉬었다.


한 간에서는 정치력 만렙에 알랑 방귀력이 대단하다며 요물로 불리기도 했으나, 눈치껏 사람을 챙기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은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일 뿐이었다. 특히 상사에게는 듣기 좋은 말 몇 번만 해주면 직장 생활이 한결 편할 텐데, 그깟 입에 기름칠 좀 하는 게 서툴러서 평생 눈치 보며 '을'의 생활을 자처하는 이들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실력은 늘 100점은 아니라도, 승진에서 누락할 만큼 뒤처지지도 않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통과할 수 있을 만큼만 했다. 불안한 마음에 집에서 노트북을 펼친 적도 야근과 철야를 해가면서 일에 매달린 기억도 별로 없다. 직무 평가용 리포트에 적당히 포장해서 쓸 수 있을 정도의 결과면 되었다.


이따금 팀원들에게 일을 던져 놓고 본인은 6시 땡 하면 우아한 백조처럼 퇴근하더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지만, 해법은 간단했다.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사비로 별다방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주면 "나 팀장님 최고"라는 찬사가 돌아왔다. 사실 '백조'라는 별명도 나쁘지 않았다. '7층 일중독 냉혈녀'로 불리는 옆팀 한 팀장에 비하면 별명마저 예쁘니까.

김칫국물 사건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feat. AI 이미지 제공)

나 팀장이 새로  셔츠를 들고 실장실로 들어오자, 먹구름 가득했던 김 실장 얼굴에 해가 들기 시작했다.


"실장님, 제가 매장 직원분께 특별히 부탁해서 다림질까지 해서 가져왔어요. 컬러는 화이트고요. 최대한 실장님한테 어울릴만한 깔끔한 스타일로 골라봤습니다."


 나 팀장은 먼저 퇴근하겠다는 말과 함께 유유히 실장실을 빠져나왔다. 한쪽에는 신 팀장이 마른 장작마냥 수분감 하나 없는 얼굴로 연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때 마침 나 팀장 핸드폰에 택배 배송 알림 메시지가 . 해외 사이트에서 직구한 원피스가 오늘 도착했나 보다. '이 맛에 월급 받고 사는 거지!' 출입문을 빠져나가는 또각또각 힐 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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