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팀장은 급히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 신고는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실장실 문을 두드렸다.
"어 신 팀장,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보다시피 내 셔츠 꼴이 말이 아니어서 말이야. 한 여름이라 재킷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 실장님 다 이해합니다."
"김칫국물 사건 발생 시각에 신 팀장은 자리에 없었던 거 맞나?"
순간 김실장의 눈에서날카로운광선이 번쩍였다. 김 실장의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고상하게 공격하기 딱 좋은 먹잇감을발견했을때, 다른 하나는 신사적으로 화풀이하기딱 좋은먹잇감을 찾았을 때다. 신 팀장은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고출력 레이저를 감각하며어릴 때 키웠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평소점잖고 차분하던 녀석은 끼니때가 되면당장이라도 할퀼 기세로살벌한 눈빛을 보이곤 했다.
김 실장 얼굴에 성난 고양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신 팀장은 수분기 하나 없는 뻣뻣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네, 저.. 거래처에서 연락이 와서 밖으로 나가 통화하고 있었는데,갑자기 식당 불이 꺼지더라고요. 사람들이 모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어서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돌아왔을 땐 어떤 상황이었지?"
"제.. 제가 룸으로 들어갔을 땐 모두 일어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어떤 상황인지 확실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실장님, 죄,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을 드려야 하는데..."
김 실장은 "흠" 소리와 함께 왼손 엄지와 검지로 입술 아래쪽을 연신 문질러댔다. 이어 엄지손톱으로 한 자리만 벅벅 긁어대니 접촉된 자리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붉은색이 짙어짐에 따라 신 팀장의 긴장도는 더욱 상승했다. 방안 온도는 에어컨 덕에 시원한 편이었지만 공기는 숨 막힐 듯 답답했다.
그때 나 팀장이 쇼핑백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미소 하나로 막혔던 공기가 뚫리기 시작했다. 계절을 넘어 시원한 코스모스 바람이 불었다. 김 실장을 손쉽게 구워삶아 먹는 나 팀장이 부러워 마지못해 얄밉기까지 했으나, 이보다는김 실장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사나운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김 실장이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 팀장, 오늘 약속 있나?"
"아니요. 별일 없습니다."
"그럼 나랑 술 한잔 하지."
오늘은 소주였다. 어제는 막걸리였는데.
6개월 전 신 팀장이 아직 차장 직함을 달고 있던 무렵, 김 실장의 '음주 메이트(음메)'라 불렸던 양 팀장이 퇴사했다. 양 팀장은 김 실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던 만큼그의 퇴사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워낙 갑작스러웠기에 한 동안 부서 내에서는 퇴사의 이유를 찾기 위한 탐정 놀이가 유행하기도 했다.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음메'를 잃은김 실장은 남 직원 위주로 두세 명씩 그룹을 지어 순번대로 본인과 저녁을 먹(어야 하)는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이는 결국 "실장님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의 시간"이라는 비공식적인 공식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는데, 직원들 사이에서는 하품이 나올 만큼 길고 지루한 명칭 대신 "음메 찾기 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음메 찾기 놀이는 3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주기적으로알코올과 진솔함을 동시에 강요당한 직원들이 영육 간의 고통을 호소하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쯤 야근하는 시늉을 하거나 몸이 아프다며 순번을 바꿔달라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당일 저녁까지도 멤버가 확정되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김실장은 번번이 집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신 팀장(당시에는 신 차장)을 호출했다.
일명 '예스맨 강박증'을 앓고 있는 신 팀장은 윗사람에게 'No'라는 말을 절대 못 하는 인간이었다. 단연코 이 병을 앓고 있다고 밝힌 적도 없으며,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궁예의 관심법에 관심이 있는 김 실장이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타의적인 '음메'로 활약한 지 한 달가량 지났을 무렵, 김 실장이 소주잔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신 차장, 양 팀장 퇴사하고 나서 운영 2 팀장 자리 공석이잖아? 그 자리를 신 차장한테 줄까 하는데."
이미지 출처 : 뤼튼 (AI)
차장 2년 차에 팀장 승진이라니 파격적인 인사였다. 특별히 주목받기 위해 아등바등한 적도 실적을 쌓으려 일 욕심을 부린 적도 없었기에 더욱 의외였다. 이런 행운도 오는구나 싶어 며칠간 잠까지 설쳤다.
기쁨도 잠시, 승진 발표 당일날 인사팀장이 면담실로 불러서는 팀장을 달더라도 직급이 부장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며 친절하게도 밑줄까지 그어 가며 설명해 주었다.다시 말해 월급 한 푼 오르지 않고 직함만 바뀐다는 의미였다.
그날 옆팀 한 팀장이 회의실로 부르더니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신 차장이 꼭 내 동생 같아서 말이야. 쓴소리 같아도 말은 꼭 해줘야겠더라고. 직급은 그대로 차장이라면서? 신 차장이 사실 그동안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준 건 없잖아. 그냥 애티튜드가 좋으니까 올려준 거야. 뭐 그것도 능력이지만. 예전에 차장인데 팀장 달았다가 조직 개편으로 팀장 딱지 떼이는 경우도 있었잖아. 앞으로 실장한테 뭔가를 보여줘야 할 거야. 신 차장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 잘 새겨둬."
진짜 동생이 있기나 한 건지도 불분명한 그녀의 주옥(발음 주의!)같은 고언이었다. 마치 세상 일을 다 안다는 듯한 오만한 말투가 불손스러워 상상 속에서나마 소금을 한 바가지 뿌려버렸다.
그러나 소가 여물 씹듯 곱씹어보니 '김 실장이 임시로 말 잘 듣는 술 팀장을 앉혀놓은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긴 했다. 김 실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직 보고서 작성도 서툴러서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한다면 실망을 줄 것이 뻔했다. 팀장으로서 실격일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손에 들어온 타이틀은 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임에 스스로도 놀라며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자료를 잘 만지는 야무진 팀원들이 있으니 잘 구슬려 활용하면서 김 실장의 '음메' 역할을 지속하는 투 트랙 방식이었다. 김 실장과 마주할 때마다 긴장하는 탓에 몸이 굳어버리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그나마 나았다. 다행히 술 마시는 것 자체도 괴롭지는 않았다. 새삼 해독 능력이 뛰어난 간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든 술을 마셔도 지장 없을 만큼 컨디션을 관리하는 게 지금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보였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각,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숙취 해소 음료를 샀다. 1+1이었다.이걸로 내일도 견디면 된다.
덧)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소설쓴다는게 정말 쉽지 않네요. 그래도 무식이 용감이라고, 완주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