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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Mar 21. 2024

내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합니다

제6화 고 팀장

본 이야기는 특정 인물과 관련이 없으며, 상상에 기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수요일 오전 9시. 고 팀장 쪽에서 날카로운 전화벨이 울렸다. 김 실장의 호출이었다.


"아이 씨X!"


고 팀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벽에 걸린 낡은 시계를 향해 은혜로운 육두문자를 쏘아 올렸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불협적으로 튀던 타이핑 장단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질서 정연하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무실 분위기는 한층 경건해졌다. 자판을 두드리는 이들 모두 욕받이의 실제 대상이 시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고 팀장은 어제 저녁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퇴근해 버렸던 장면을 떠올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면담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젊은 팀장들에게 순번이 밀린 것도 부화가 치미는데 유령 취급까지 당하다니, 이런 씹던 껌보다도 못한 대우가 더럽고 치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단전 아래로 꾹꾹 눌러 담아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할 기세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빨대가 끼익 끼익 컵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낼 때까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아재꼈다.


그런데, 실장실로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졌다.


"제가 고 팀장님한테 많이 의지하는 거 아시죠?"


"예예, 실장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역시 꿈에서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대답이었다.


"하루 지났으니 그냥 덮어둘까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고의적으로 김칫국물을 부었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아서요. 어제 몇몇 팀장들하고 이야기해 봤는데, 젊은 사람들이라 시야가 좁은 건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해요. 아무래도 고 팀장님은 경험도 풍부하시고 인맥도 좋으시니 뭔가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와 동년배시니까 대화도 잘 통하는 느낌도 있고요. 자 일단 앉아서 대화하시죠."


솔직히 이렇게 극진히 대우해 줄 줄은 몰랐다. 어쩌면 어제는 너무 화가 나서 화풀이 대상을 찾았던 것 아닐까? 아는 척도 안 하고 퇴근해 버린 건 여전히 불쾌하지만, 이렇게 차분히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릿자루처럼 세워놓았던 젊은 팀장들과 달리 친히 테이블로 안내하는 모습에서 배려심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김 실장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씹던 껌도 안 된다는 개껌 같은 생각은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뭐 꼭 범인을 색출해서 응징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동안 제가 업무에 집중하느라 부서 내 분위기나 팀장님들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이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대화나 해보자는 겁니다. 혹시 최근에 부서 내 분위기나 팀장님들 관련해서 들으신 이야기라도 있을까요?"


김 실장은 몸을 좀 더 가까이 당겨왔다. 방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최대한 볼륨을 낮추려는 의도로 보였다. 김 실장의 미간에서 진실이 보였다. '대쪽' 같던 고 팀장의 마음이 쪽갈비처럼 똑똑 부러지더니 어느새 갈빗대에서 ''가 쏙 빠진 '갈대'가 되었다. 이 기회에 신임을 얻어보자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고 팀장 역시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사실, 장 팀장님이 실장님께 불만이 많다는 소문은 계속 있었어요."


"아, 1년 전 있었던 정리해고 때문입니까?"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50대 차장님들이 전부 나가셨으니까요. 장 팀장님 입장에서는 동년배들이었으니 아무래도 위기감을 느끼시지 않았을까요? 뭐 인간적으로는 좋은 분입니다만."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구조조정 당시, 장 팀장은 김 실장이 이 참에 50대 차장들을 싹싹 긁어모아 집으로 보내려 한다며 몇 날 며칠을 길길이 날뛰었다. 사측에서 내려온 방침은 10% 감원이었으니 김 실장이 관리하는 50명 중 휴직자를 포함해 5명만 걸러지면 되었고 당시 육아 휴직자는 2명이었다. 따라서 3명만 정리하면 되는데 김 실장은 50대 차장 6명을 전부 자르려 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본인은 팀장이라 비껴갔지만 이런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부들부들 떨었다.


부서 내에서는 장 팀장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이유에 대한 탐정 놀이가 진행되었고, 몇몇 명탐정 코난급 브레인들은 대체로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실장 의도대로 나이 많은 직원들이 모두 걸러질 경우, 다음 타깃은 본인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것.


장 팀장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동안 30년 가까이 회사에 공헌한 바가 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대로 허무하게 내쳐지는 건 부당하다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장 팀장은 나이를 차치하더라도 용납되기 힘든 마이너스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월루(월급 루팡)라 불릴 정도로 근무 태도가 안 좋았다. 출근해서 자리에 안기가 무섭게 네이버 뉴스 기사부터 훑었다. 정치 경제 사회까지는 그렇다 쳐도 연예 면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건 과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했다. 연예인 열애설이 화두에 오를 때면 해당 연예인의 과거 연애사까지 소환하며 온갖 정보들을 쏟아냈다. 연예 전문 기자라도 된 마냥 우쭐대는 표정을 보는 것도 꼴사나웠다. 일이나 저렇게 열심히 할 것이지.


팀장으로서의 역량도 부족했다. 사업 계획을 세울 때마다 일일이 고 팀장의 의견을 물었다. 회의 시간에 졸거나 딴짓을 하다가 김 실장의 지시를 놓치고는 고 팀장에게 와서 이를 묻는 일도 다반사였다.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그가 성가셨지만 한참 선배인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20대 팀원에게 무시당하는 그가 안쓰러워 간단한 엑셀 수식과 PPT 작성법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다.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장 팀장은 그 자리에서 포기해 버렸다. 나이를 먹어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손도 굳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대뜸 컴퓨터와 수기 작성이 공존했던 세기말 회사 풍경을 구차하게 설명하며 필체가 좋아 칭찬을 많이 받았다는 말로 매듭 풀린 결말을 지었다.


과거에 파묻혀 현재를 바라보지 못하는 그가 답답했다. 살아남으려면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냉정해지고 싶었다. 누구는 매일같이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반면, 누구는 더 많은 월급을 받으며 태평하게 연예 기사나 심층 분석하고 있다니.

한편으로 고 팀장은 얼마 전부터 김 실장과 사이가 소원해진 상황이었다. 고 팀장은 책임감이 강하고 일 처리도 깔끔하다는 평판을 받았으나 팀원들에게는 대놓고 막말을 해대는 유형이었. 급기야 주니어급 팀원 3명이 일주일 간격으로 퇴사했고, 김 실장은 인사실까지 올라가 사태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인력 관리는 부서 평가에서 중요한 지표인 만큼 김 실장이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 없었다. 해당 팀 직원들에게 고충이 있을 경우 고 팀장을 거치지 말고 직접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고 팀장은 실력으로 승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보고 준비를 해와도 어떻게든 꼬투리가 잡혔다. 김 실장다운 젠틀한 맹폭들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 번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실장이 젊은 인력들로 팀장들을 재배치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일단 고 팀장과 장 팀장 중 한 명을 내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능력 좋은 본인이 타깃이 되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되었으나, '예스맨' 신 팀장의 승진을 보며 오산임을 깨달았다.


'김 실장은 말 잘 듣고 다루기 편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건가?'


장 팀장이 일은 제대로 안 해도 김 실장에게 대항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김 실장 눈에는 자신이 더 거슬릴지도 몰랐다.  


그러던 중 오늘 기회가 찾아왔다. 안 그래도 대나무 숲에라도 찾아가 장 팀장에 대해 외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다만, 그가 찾아간 대나무 숲은 김 실장이 심어 놓은 인공 숲이라는 점, 게다가 대나무 숲도 아닌 아닌 갈대밭이라는 점이 상상과는 조금 달랐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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