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실장은대뜸 어제저녁 일정부터 물었다. 면담 차례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던 다른 팀장들과 달리,장 팀장이먼저 퇴근한연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장 팀장은 굳이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귀한 저녁 시간까지 헌납하면서까지실장의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팀장들의 태도가 마뜩지 않았던 차였다.
장 팀장은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두 손으로 안경다리만 만지작 거렸다. 김 실장은 민망한 듯 애써 큰 소리로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어제 동석하셨던 자리에서 제 셔츠에 김칫국물이 쏟아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암전이었는데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요."
"예예"
"신 팀장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나 팀장은 다리가 저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요. 분위기를 좋게 이끌던 한 팀장이 그럴리는 없고, 고 팀장님은 터프해 보여도 마음은 또 여린 양반이라.."
장 팀장은 안경 너머로 김 실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실장님 혹시 저를 의심하고 계시는 겁니까?"
평소 불필요한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싫어 김 실장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는 그였지만,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아이고,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제 어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고충이 있으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털어놓으십사 해서요."
"실장님, 제가 비록 나이 먹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지만 여전히 애사심도 충만하고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 바가 큰 사람입니다. 아무리 섭섭한 일이 있다 해도 그렇게 복수할 만큼 형편없는 놈도 아니에요. 그리고요. 실장님이 핸드폰 찾다가 의도치 않게 그릇들을 건드렸을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제 앞에 식기들 건드렸거든요. 왜 사람을 함부로 의심합니까? 저는 더 이상드릴 말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장 팀장은 거칠게 실장실 문을 열어젖히고는 그 길로 사무실을 나갔다. 카페에라도 들어가 달달한 음료로 열기를 식힐까했으나일단 그냥 걷기로 했다. 평화로운 카페에선 맘 놓고 거친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음을 뗄 때마다 입을 부풀려 후 소리를 내며 끝까지 숨을 내뱉었다. 타버릴 듯한 속이 진정되자 그제야 삼복더위의 맹렬한햇빛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 한 봉지와 맥주를 한 캔을 샀다. 가장그늘 진 파라솔에 자리를 잡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김 실장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 최대한 참고 견디는 중이었다.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였지만 늦둥이 셋째가 아직 중학생이라 갈 길이 멀었다. 이제 와서 직장 생활을 때려치우고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수년 전부터 젊은 팀장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그들 위주로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뒷방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동기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나거나 쫓겨났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새로 부임하는 상사들과의 나이 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그들은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늘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김 실장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장 팀장은 변화된 현재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될 때마다 곱절은 노력해야 하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였기에, 윗선에서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혁신이라는 말 자체가 아득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포자기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베테랑으로서 후배들에게 노하우와 경험을 나누어주며 나름 회사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평가 등급은 늘 꼴찌에 가까웠고 정체되어 있다는 지적만이 돌아왔다.
외따로 떨어진 그늘에서 초라하게 시들다 가장 먼저 나무에서 떨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이대로 어디론가 쓸려갈 것 같아 납작 엎드렸다. 흙바닥에 비가 섞여 진흙탕을 이루던 날 젖은 낙엽이 되었다.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은 듯했다.이대로젖은 낙엽처럼 살기로 했다.
인물 관계도 (그림 출처 : AI 뤼튼)
이제 12시인 데다 날씨까지 무더운 탓인지 금세 술기운이 돌았다. 띵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핸드폰알람이 왔다. 막내가다니는 학원에서 결제된 카드 승인 문자였다.
'아, 맞다 방학 특강 듣는다고 했지?'
지출이 또 늘었다. 이대로 회사 출입문마저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가양치를 한 후, 혹여나 술 냄새가 남아있을까 봐 껌을 뭉텅이로 입에 털어 넣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김 실장이 돌아왔다.
똑똑똑, 실장실 문을 두드렸다.
"실장님 아까는 제가 무례했습니다.실장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화 도중에 나가버린 건 결례가 맞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김 실장은 "예예"라는 말만 반복했고, 장 팀장은 몇 번 더 머리를 조아리고는 조심스럽게 실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속에서 자꾸만 뜨거운 것이 올라와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