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라미 Oct 26. 2024

완벽한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다니

제8화 김 실장

수요일 오후 2시. 갑작스러운 본부장의 호출이었다.


"김 실장, 월요일에 품의 올렸던 시스템 추가 도입 건 말이야.'


"예에, 본부장님.""


이미 구두 보고가 완료 시스템 추가 도입 관련 내용이었기에, 김 실장은 별거 아니다 싶어 짐짓 안도하며 엷은 미소를 띄어 보였다. 그러나 본부장은 그 미소를 빤히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야 분위기 파악에 들어간 김실장이 미소를 거두자 본부장이 입을 떼기 시작했다.


"내가 어제 경영본부장이랑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이게 예산이 조건부 승인이었다고 하던데? 올해 초에 시범 도입한 사업부에서 활용성이 입증되어야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고. 내 작년 보고된 내용 찾아보니 경영본부장 말이 맞더군. 어떻게 된 거지?"


김실실장은 본부장의 질문이 진짜 그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망했다는 생각에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맹독사를 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단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야 한다. 당장 멀리 날아갈 수는 없어도 뱀에게 물리지 않을 만큼 높은 곳으로 말이다. 최대한 논리를 끼워 맞춰서 점프해 보기로 했다.


"아, 당초 조건은 그게 맞습니다만, 아무래도 현재 도입된 시스템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기존 AI는 너무 기본적인 기능 밖에 없어서 좀 더 고급 기능들을 탑재한다면 업무 효율이 몇 배는 좋아질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작년에 보고할 때 향후 Advanced AI 기능 탑재 시 기대되는 추가 효과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이 정도면 1차 도약은 성공이다.


"아, 그래 내 기억은 하지. 그런데 이건 트라이얼 버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야 추가로 도입도 가능한 거 아닌가? 일단 그쪽 사업부 반응은 어땠어? 실제 유저들한테 서베이라도 해서 용 효과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나서 예산 집행에 들어가야 순서가 맞지."


안심하기가 무섭게 2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맹독사가 온몸을 휘감기 전에 다시 무장하고 뛰어올라야 한다.


"아, 그건 좀 더 완벽하게 시스템을 만들어서 Phase 2로 트라이얼을 진행한 후에 만족도 조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휴, 겨우 모면했다. 이제는 숨겨진 날개를 찾아내야 한다. 멀리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다.


"이봐, 김 실장 그럼 일을 두 번 하는 꼴이 아닌가? 올초에 시스템 도입 관련해서 직원들 시간 빼가면서 교육 시간 마련하느라 내가 그쪽 본부장한테 아쉬운 소리 했던 거 몰라? 근데 그게 불완전한 시스템이었고 AI 기능을 심은 후에 또 진행한다고 하면 그쪽에서 흔쾌히 따라줄 거라고 생각하나?"


아, 이런. 날개를 찾기도 전에 휘감기고 말았다. 본부장은 더욱 강하게 숨통을 조여 온다.


"게다가 지금까지 시스템 도입에 부은 돈이 얼마야? 작년에 설계 전에 스케일 업까지 생각해서 가격을 네고했어야 했다고. 게다가 AI 산업 자체가 생성형이다 뭐다 해서 엄청 변화하고 있으니 좀 지켜보면서 해도 되지 않겠어? 누더기처럼 붙여가면 시스템도 지저분해질 수 있잖아. 김 실장은 자꾸 일을 벌여서 성과를 내려는 경향이 있어. 왜 이리 급한 거야? 이 건은 일단 도입 부서 반응부터 분석해서 보고하도록! 내 경영본부장한테 쪽팔려서.."


AI로 그려본 김 실장 이미지 (출처 : 뤼튼)

7층으로 내려온 김 실장은 창문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왼손으로 턱밑을 문지르다 뾰루지 하나가 잡히자 몹시 성가시다고 느껴졌다. 깊게 자국이 생길 때까지 손톱으로 꾹꾹 눌러 대다 쥐어뜯기 시작했다.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뾰루지는 더 부풀어 오르는 듯했고, 손톱 아래에는 애꿎은 피방울이 스몄다.


본부장에게 구두 보고 후 품의를 올린 시점은 월요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산이 이미 확보되었으니 본부장은 별 문제없겠다며 진행을 승인했다. 그런데 하룻밤새에 모든 것이 뒤집혀버렸다. 화요일인 어제 말이다.


어제는 김치굿물이 쏟아진 날이었다. 오후에는 엉망이 된 셔츠가 신경 쓰인 나머지 실장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온통 범인 찾기에만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 여파로 그 전날 품위를 올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그놈의 김칫국물이 이성과 집중력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만약 김칫국물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꼼꼼하고 치밀한 성향의 김 실장은 어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거라며 분루를 삼켰다. 기획실장에게 한 번 더 연락해서 예산이 문제없이 집행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쪽 분위기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윗선에서 대화가 오가기 전에 본부장에게 긴급 보고를 해서 대책을 강구했을 수도 있다. 반나절만 제대로 투입했다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 구멍을 메우는 방법을 강구하고 보완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잠시 보류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본부장이 최소한 쪽팔릴 일은 겪지 않았을 수 있다. 어쩌면 본부장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건 무방비로 망신을 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짜 최악의 경우는 이것이었다.


김 실장은 침착해보려 눈을 지그시 감아봤지만, 본부장이 쪽팔렸다는 말을 할 때 번쩍였던 서슬 퍼런 눈빛만 떠오를 뿐이었다. 이는 정확히 지난해 본부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 실장을 내치기 직전에 보인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 눈빛은 김실장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다 망할 김칫국물 때문이다. 김칫국물은 셔츠에만 얼룩을 남긴 건이 아니었다. 그동안 우상향을 거듭해 오던 완벽한 인생에도 오점을 남겨버렸다. 마치 저주를 걸듯.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데다 가슴마저 답답해서 한시라도 빨리 회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6시가 되지 마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급하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 누구와 옷깃조차 스치고 싶지 않아 1시간 반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몰골이 제법 처참했는지 와이프가 당황 섞인 울상을 짓는다.


"어머 꼴이 이게 뭐야?"

"뭐 그렇게 됐어."


"밥은 안 먹고 온 거지?"

"반찬 뭔데?"


"응. 김치찌개."

"에이  진짜 엿같네. 하필이면 왜 김치야!! 왜 김치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