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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26. 2024

그들의 춤사위는 계속된다

제9화 윤 과장

김 실장이 떠났다. 김칫국물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3개월 후였다. 그는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지부장으로 발령받았는데, 누가 봐도 문책성 인사의 냄새가 풍겼다. 시스템 추가 도입 건이 발단이 되어 선의 신뢰를 잃었다는 후문이었다.


김실장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김칫국물 사건의 범인을 찾고 싶어 했으나, 이빨이 몽땅 빠진 호랑이의 탐정 놀이에 호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 실장이 떠난 후 실장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었는데, 윤 과장이 보기에 한 팀장은 내심 깜짝 인사가 발표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사이가 걸쩍지근한 고 팀장에게 커피까지 사주며  정보를 캐려 했다. 고 팀장은 급하게 친한 척 다가오는 그녀가 자못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마다하지 않고 커피를 꿀꺽꿀꺽 다 마셔재끼는 걸 보면 한 팀장이 인맥 왕이라며 치켜세웠을 것이 뻔했다. 정보에 밝은 옆자리 이대리한테 들은 , 한 팀장이 실장이 될 확률은 그녀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올해 깜짝 우승을 할 확률보다도 더 낮다는 전언이었다.


넙죽넙죽 커피만 받아먹는 고 팀장이 뻔뻔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 세계가 늘 그렇듯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는 법이었다. 어제까지 삿대질하던 적의 손을 필요하다 싶으면 덥석 잡아버릴 수 있는 뻔뻔함은 관용 혹은 용기로 포장되었다. 적의 적이 내 편이 되는 시나리오는 보편적 진리를 넘어 영원불변의 과학에 가까웠다.

   

공석은 얼마 지나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로 채워졌는데, 오피셜이 뜬 날 한 팀장은 웬일로 6시에 칼퇴근을 했다. 다음 날에는 숙취에 허덕이는 듯 하루 종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윤 과장은 숙취를 견디는 데 탁월하다는 음료라도 사다 줄까 하다가 괜스레 오버해서 본인이 못 견딜 상황에 처할까 싶어 관뒀다. 술병 덕분에 별다른 지시 사항도 없는 데다 그날 예정되었던 보고 일정들도 친히 다음날로 미뤄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저대로 술독에 빠져지 내는 것이야 말로 모두를 위해 옳은 길이었다.


그 다음날 한 팀장은 오후에 휴가를 냈고, 다음다음 날에는 뽀글이 펌을 하고 나타났다. 시그니처였던 칼단발을 버리니 평범한 아줌마처럼 보였다. 덕분에 냉혈녀였던 이미지가 조금이나마 다가가기 편안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몸속을 알코올로 소독하고 고수하던 헤어스타일까지 내던지며 몸과 마음을 쇄신한 듯했다. 위로 올라가려는 욕심보다는 신임 실장의 보조를 맞추는데 전력을 다했다. 윤 과장은 그녀가 상황을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잠시 감화되기도 했다.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는 대신, 빨리 해결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른 나이에 인정받고 팀장직을 맞은 데에는 그만큼의 비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팀장은 여전히 우아한 백조로 살았다. 변화가 있다면 쌍꺼풀 수술을 해서 한층 더 눈매가 또렸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덕분에 '우아' 딱지를 떼고 '쌍수한 백조'라는 별명이 붙었다. 외모와는 별개로 정치질인지 생존질인지 모를 센스력은 신임 실장에게도 통했다. 윤 과장은 그녀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저런 건 선천적 재능일까? 후천적 능력일까? 나도 배우면 회사 생활이 좀 달라질 수 있으려나? 근데 배운다고 되려나?


신 팀장은 이제야 초보 팀장 티를 벗었다. 보고서 작성 능력은 여전히 부족했으나 티 나지 않게 포장하는 능력이 일취월장한 듯했다. 실무 능력보다 관리 능력을 키우는 쪽으로 콘셉트를 확실히 잡았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소식은 김 실장이 떠나고 음메(음주 메이트) 역할이 없어지자 예전의 뽀얀 피부색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고 팀장은 신임 팀장이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리다는 소식에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이 구역의 박쥐답게 언제 그랬냐는 듯 실장의 비위 맞추기에 앞장섰다. 모두가 예상했던 일인지라 그 누구도 놀라거나 화제로 삼지는 않았다.


장 팀장은 여전히 뭘 하고 있는 건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아리송했다. 경력이 화려한 신임 실장이 프레셔를 거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윤 과장은 모든 직원을 존중하고 예의 있게 대하는 장 팀장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모쪼록 끝까지 잘 버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화요일 11시 반. 주간 회의를 마친 신임 실장과 팀장단은 다 함께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들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사무실 입구 저편으로 멀어질 때까지, 윤 과장 눈앞에는 실장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팀장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꾸역꾸역 어떻게든 센터에 서고 싶어 하는 한 팀장,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고 아이돌 춤을 추는 나 팀장, 흘끔흘끔 눈치껏 리듬을 타보는 신 팀장, 과격한 몸놀림으로 이 춤 저춤 막 갖다 쓰는 고 팀장,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외로이 관광버스 춤을 추는 장 팀장이었다. 그들의 춤사위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느 곳에도 김 실장의 흔적은 없었다.

AI로 그려본 윤과장 이미지 (출처 : 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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