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씨, 우리 회사 마케팅부에 자리가 났던데, 한번 지원해 보는 거 어때? 일단 1년 계약직인데 잘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기회도 준다더라고. 회사에 빌런이 많긴 해도 큰 회사인 만큼 복지도 좋은 편이고 뭐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어디 가서 명함 내밀긴 괜찮은 회사야."
마침 계약기간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소영에게는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했다. 윤 과장이 이직한 회사 정도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중견기업인 만큼 욕심을 내기에 충분했다. 좀처럼 없는 기회라는 생각에 꼼꼼하고 성실히 준비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러나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뽑아준 팀장이 떠났고, 팀장직을 대행하던 차장은 실장과 잦은 마찰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경쟁업체로 이직해 버렸다. 마음을 의지했던 옆자리 대리는 출산 휴가에 들어가며 육아휴직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제 남은 이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남자 과장뿐이었다. 알고 보니 10년 전부터 줄곧 과장 승진에서 누락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과장 대우를 받는 인물로, 출산 휴가에 들어간 대리보다 업무에 미숙한 듯했다.
팀은 자연스레 공중분해 되었고, 소영이 하던 일은 옆팀으로 흡수되었다. 정규직 전환의 꿈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였다.
동생의 임용고시 도전은 올해로 3년째였다. 소영은 자신이 이미 포기한 꿈을 동생이 이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게 동생을 응원했다.
첫해에는 아쉽게 낙방했으나, 1년만 더 하면 꼭 붙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감을 불태웠다. 실제로 모의고사 성적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고, 컨디션 관리에도 노하우가 붙은 듯했다.
그러나 위층 가족이 이사 온 이후로 동생은 공부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며 늘 수면 부족을 달고 살았다. 위층에서 한 발짝 뗄 때마다 온 집안은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듯 쾅쾅 울려댔다. 소영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이 예민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동생은 고육지책으로 스터디카페를 다니기로 했지만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10시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매번 바깥 음식만 사 먹으며 공부하는 것이 영양적으로 좋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밥을 먹고 공부를 하자니 발망치 때문에 신경이 쓰여 짜증이 났고, 잠에 들자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급기야는 병원 상담을 받게 되었고 처방받아온 신경안정제를 먹은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부모님은 참다못해 관리실을 통해 한 번 더 민원을 넣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에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층간 소음주의 안내문이 붙었다.
소영이 엄마와 함께 할머니 댁에 가서 김장을 도와드리고 온 날이었다. 지하주차장에서 김치를 싣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는데 누군가 다급히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빨리 와. 엘리베이터 문 닫히겠어요."
변성기가 꽉 들어찬 사춘기 남학생의 목소리였다.
"야, 네가 좀 잡고 있으면 되잖아."
짜증 섞인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소영은 열림 버튼을 눌러주었고, 이내 남학생은 뛰어들어왔으나 중년의 남성은 한참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매우 규칙적인 간격으로 망치로 못을 박는 듯한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까지 들어왔다. 그의 여유로운 리듬에 맞춰 1초에 한 번씩 온 아파트가 진동하는 듯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마지막 한 걸음까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발망치질을 계속했다.
"윗집 아저씨야."
소영 엄마는 옆구리를 툭툭 치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전했다.
앗 저 사람은? 회사에서도 여러 번 봤던 사람이다. 윤 과장이 속한 부서의 실장이었다. 김 실장이라고 했던 것 같다.
밤이면 밤, 주말이면 주말, 시도 때도 없이 발망치로 방바닥을 때려 박던 그 자식이 우리 회사 김 실장이었다니. 소영은 당장이라도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 볼따귀를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영이네 가족은 단지 내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층간 소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곳 - 가장 꼭대기 층 - 이면 충분했다.
퇴사 전날, 윤 과장이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그녀는 소영이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것이 마치 자기 탓이기나 한 것처럼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반면 소영은 이곳을 선택한 것이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으므로 그녀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리어 이전 회사에서 계약기간이 끝나 오갈 때 없던 자신을 챙겨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즐거운 식사자리가 되어야 마땅했던 그날, 옆 자리에는 김 실장과 딸랑이들이 앉아 있어 식사를 하는 내내 거북했다. 윤 과장과는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 못한 채 고개를 처박고 밥만 먹었다. 그러던 중 전화가 왔다. 동생이었다. 윤 과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룸밖으로 나왔다.
"언니, 나 이제 그만 임용 포기할까 봐."
"아니 왜,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우리 이사도 했고 이제 층간 소음도 없으니 올해야말로 정말 잘 될 거야."
이따가 이야기하자는 말과 함께 일단 전화를 끊었다. 사실 소영은 동생이 작년에 1점 차이로 떨어진 이후에 마음을 못 잡고 있다는 것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층간소음에 덜 시달렸다면 작년에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밤이고 새벽이고 온 집안을 쾅쾅 울려대는 발망치만 아니었다면 동생은 덜 예민해졌을 테고 컨디션 관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빌런처럼 달라붙어서 내 동생 인생을 망쳐놓은 인간이다.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나의 귀한 점심시간까지 불쾌하게 만들어놓은 인간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룸으로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불이 꺼졌다. 사방이 암흑처럼 캄캄해졌다. 사람들은 핸드폰 불빛에나마 의지를 하기 위해 핸드폰 찾기에 혈안인 듯했다. 다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모양으로 팔푼이들처럼 이리저리 더듬거렸으나 소영의 눈은 금세 적응했는지 희미하게나마 사물의 구분이 가능했다. 김 실장 쪽 테이블을 보니 소영보다 먼저 전화를 받으면 나간 신 팀장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덕분에 김 실장의 손으로 추정되는 움직임이 바로 보였다. 그 역시 핸드폰을 찾느라 테이블 위아래로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소영은 그 앞에 있는 반찬 그릇 하나를 슬쩍 건드렸다.
"앗, 이게 뭐야?"
절규에 가까운 김 실장의 외침이 들렸다.
소영은 아무 일 없는 듯 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그때 전기가 들어왔다.
비록 김치로 싸대기는 못 때렸지만, 김치 국물로 대신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계획한 바는 아니었으나 운명 같은 우연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처박고 먹느라 얹혀 있었던 체기가 쑥 내려가는 듯했다. 남은 밥을 싹싹 비워냈다.
"윤 과장님, 우리 무지 달달하고 시원한 음료 마시러 가요! 제가 살게요!"
그날, 식당 자리 배치도
이상으로 저의 첫 소설을 완성해보았습니다. 도중에 쓰다가 자신이 없어져서 연재를 취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완성은 해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써서 서랍 속에 고이고이 넣어두었다가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내보내 봅니다. 마무리했다는 자체만으로 기분이 상쾌한 걸 보니 끝까지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2번째 에피소드로 "누가 김 실장 신상 구두를 훔쳤나?"라는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TMI : 글을 쓰는 도중에 김 실장의 성을 다른 것으로 바꿀까 하다가, 회사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빌런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가장 흔한 성씨인 "김"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