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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Mar 10. 2024

일을 열심히 할 뿐인데, 왜 욕하는 거죠?

3화 한 팀장

본 이야기는 특정 인물과 관련이 없으며, 상상에 기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어머, 벌써 5시가 넘었네."


한 팀장은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며 이제야 시계를 다. 허리가 뻐근하다. 손깍지를 껴서 천장 쪽으로 쭉 뻗어본다. 위아래로 몸을 쭉쭉 늘리니 한결 개운해진다.


보고서를 쓸 때면 초등학교 시절 떠오르곤 한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 지금부터 시작해 보세요!"라는 선생님의 구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요령 피우거나 한눈팔지 않고 문제에만 집중했다. 한 문제씩 차근차근 풀다 보면 어느덧 마지막 문제에 이르렀다. 늘 가장 먼저 교과서를 들고나갔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자리로 돌아올 때면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압도적인 1등이었다.


기획 담당인 그녀는 이쪽 업무가 체질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최선단에서 업계 동향을 살피고,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는 일을 할 때면 남들보다 앞서가는 기분이 들었다. 트렌드와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면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쾌감이었다. 누구는 진상 고객 때문에 속을 썩고, 더러는 시스템이 고장 나서 일이 안 된다며 울상을 지으며 남 탓을 할 때, 자신은 고고하게 보고서만 붙들고 있으면 되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었으니, 자기 통제가 가능한 업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가끔 윗 선에서 급하게 보고 지시가 떨어질 때도 있지만, 이 쪽 분야에서 성실히 먹어온 짬은 배신하지 않았다.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능력은 물론, 오피스 툴을 다루는 실력도 수준급인 데다 프레젠테이션 스킬도 뛰어난 편이라 대부분은 수월하게 넘어갔다.


이날, 3시간가량 꼼짝 않고 보고서만 썼더니 달달한 바닐라 라테가 당겼다. 머리도 식힐 겸 카페에 다녀오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내선전화가 걸려왔다.


김 실장이었다.

AI가 그려준 김 실장 이미지

김 실장은 의자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팀장의 눈길이 명치 부근의 김칫국물 쪽으로 향하자,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팔짱을 살짝 위로 어올렸.


그는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김칫국물" 사건의 범인을 찾고 있다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때로는 눈을 감기도 했고, 이따금씩 머리가 아픈 듯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눌러 빙빙 돌렸다. 이내 김 실장은 의자를 창문 쪽으로 돌려 않고는. '' 소리를 길게 내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장실 유리벽 너머로 퇴근하는 직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할 때쯤, 실장이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래서 한 팀장은 이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거죠?"

"네 실장님, 말 그대로 암전이었고, 저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빨리 핸드폰을 찾아서 후래쉬를 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실제로 휴대폰! 휴대폰! 하며 외치기도 했고요. 게다가 자리가 구석인 데다 그쪽 벽이 약간 돌출되어 었었는지 제 자리가 좀 좁았어요. 사실 그게 너무 불편해서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럼, 일부러 나한테 쏟은 건 누구라고 생각해? 눈썰미 좋고 예리하니까 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평소에 들은 이야기도 있을 거고."

"글쎄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팀장의 대답에 성의가 없는 듯 보이자 김 실장의 표정은 한층 더 구겨졌다.


"아니, 한 팀장 이건 중대한 사안이에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명색에 승진 1순위인 기획 팀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소극적이어서야 되겠습니까? 내 안 그래도 한 팀장이 요즘 일 욕심을 너무 부려서 불편하다는 컴플레인을 받았어요. 일단 일 가져오는 것까지는 좋다고 칩시다. 한 팀장이 능력도 좋고, 그게 다 회사 위해서 열심히 일하려는 거니까. 그런데 실적 쌓기 좋은 일만 쏙쏙 빼와서는 그쪽 팀원한테 협조 좀 하라고 달달 볶는다면서? 이왕 가져왔으면 본인이 과정까지 맡아야지 결과만 취하려 하면 어떻게 합니까? 왜 그렇게 트러블을 만드는 거야?"


최근 혁신 담당인 고 팀장 쪽과 마찰이 좀 있었는데, 그 일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 팀장이 뭘 어떻게 전달했는지는 몰라도 그 내용은 사실과 달랐다. 기획 팀에서 추진 중인 새로운 시스템 도입과 관련해서 고 팀장과 협업을 하던 중 손 발이 잘 안 맞았다. 어느 날 고 팀장이 그럴 거면 기획 쪽에서 일을 다 가져가라며 언성을 높였다. 김 실장에게는 본인이 알아서 보고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실무자인 그쪽 직원에게 지금까지 진행된 내용이나 자료를 전달해 달라고 한 것뿐인데, 졸지에 껍질은 뱉어버리고 알맹이만 쏙쏙 골라먹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어 버리다니.

AI가 그려준 한 팀장 이미지

일 욕심 많고 인정 욕구도 강해서 몇몇 팀장들 사이에서 '독한 년'이라 불리는 것쯤은 한 팀장 본인도 알고 있었다. 일 잘하는 직원들을 편애하고 성과 없는 직원은 즉각 내친다며 '7층 일 중독 냉혈녀'라는 별칭으로 블라인드 앱에 오르내린 건 또한 진작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회사가 잘 되고 자신도 잘 되기 위한 과정일 뿐, 악의는 없었다. 남 사정 다 봐주고 일  못 하는 직원까지 끌어안는 건 쓸데없이 리스크만 키우는 꼴이라 생각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냉정을 유지해야 성과도 따르는 법이라는 지론이었다. 성과를 인정받으며 선두 자리를 지켜내고 싶었다. 사업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1등 자리를 채갈까 불안했다. 가장 먼저 위로 올라가길 열망했다.


김 실장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고 그 자리를 꿰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실장을 빛내주겠다는 신념 하나로 뒤에서 별별 욕을 다 먹어가며 의 오른팔을 자처해 왔다.


김칫국물 사고, 아니 사건 발생 당시만 해도 별 일 아니라 여겼다. 실장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 알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보고서에 집중한답시고 그의 심기 하나 살피지 못했다니, 한 순간에 신뢰가 추락해 버린 것 같았다. 이 틈을 타고 다른 팀장들이 오른팔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졌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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