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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Mar 07. 2024

누가 김실장 셔츠에 김치 국물을 흘렸나?

2화 암전, 그리고 사고, 아니 사건

본 이야기는 특정 인물과 관련이 없으며, 상상에 기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말 그대로 암전이었다.  앞의 물체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방안은 캄캄했다.


"어머, 정전인가 봐! 후래쉬, 후래쉬! 휴대폰 어디 있지?"


한 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일제히 손을 더듬어 휴대폰 찾기에 나섰다. 다만, 나 팀장은 휴대폰보다 저린 발부터 해결하는 쪽이 더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오늘 미니 스커트를 입고 온 탓에 한쪽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더니 몸을 옴짝달싹 못할 만큼 쥐가 났던 것이다.


그때 김 실장 쪽에서 절규에 가까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앗, 이게 뭐야?"


그제야 하나 둘 플래시가 켜지기 시작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플래시의 초점은 김 실장에게로 향했다. 졸지에 플래시 세례를 맞은 김 실장은 있는 힘껏 눈을 감고 오만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에이씨, 눈에다 후래쉬를 쏘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들 다른 쪽으로 비춰요!"


플래시의 방향이 일제히 벽이나 문쪽으로 향하자 김 실장은 바로 앞에 마주 앉은 고 팀장에게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아니 아니, 고 팀장은 나를 비춰줘야지. 지금 내 옷에 뭐가 쏟아졌다고요! 사람이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야."


팀장이 수박 씨(나)발라 먹으라는 표정을 지은 후 다시 김 실장 쪽(좀 전보다는 살짝 아래쪽)을 비추자 김 실장의 언성은 한층 더 높아졌다.


"에잇, 이것도 눈이 부셔서 안 되겠네. 돌려요 돌려! 신 팀장이 일어나서 아래로 비춰봐요."


"실장님, 신 팀장은 아까 전화받으러 나간 것 같은데요."


"그럼 나 팀장이 와서 해줘요."


"실장님, 저는 아까부터 다리가 저려서 못 일어나요."


"아오 환장하겠네. 냄새가 시큼한 걸 보니 아무래도 김치가 쏟아진 것 같은데?"


김 실장은 셔츠 앞 자락을 빼서 제대로 냄새를 맡아볼 요량으로 앉은 자세 그대로 좀 더 뒷벽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때 넓적다리 위에 걸쳐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순간 형광등이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사방이 환해졌다.


그러나 암흑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일동은 김치 그릇둔탁하게 바닥과 맞부딪치는 소리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이내 마지막 수명을 다한 팽이처럼 비틀거린 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야 상황 파악에 들어간 팀장들은 재빨리 냅킨을 한 움큼씩 뽑아 실장에게 전달했다. 각자의 자리 위에 올려져 있던 1회용 행주까지 총동원되었다.


"아이씨, 이거 새로 산 셔츠란 말이야!!!"


지금까지 김 실장은 그 누구 앞에서도 성질을 부리거나 고함을 친 적이 없었다. 성격이 무던해서라기보다는 안 좋은 상황일수록 빠른 해결을 위해 오히려 침착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기 때문이었다. 팀장들은 화난 김 실장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모르며 쥐 죽은 듯 눈치만 보았다. 적막이 감도는 방안에는 행주를 셔츠에 벅벅 비벼대는 비트에 맞춰 점점 더 거칠어지는 김 실장의 한숨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사무실 어느 곳에서도 김 실장의 위풍당당한 구둣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탕비실에 가는 것도 두려워 목이 말라도 참았고 오후 2시와 4시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루틴마저 건너뛰었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그나마 오후 회의가 없어 실장실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오후 5시, 한계였다. 더 이상 참는 건 불가능했다. 화장실에 가야 했다. 실장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이 들킬 새라, 필사적으로 양팔을 감싸서 몸을 움츠렸다. 발걸음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짙은 네이비 컬러의 바지는 티가 많이 나지 않았으나, 새로 장만한 톰 브라운 화이트 포플린 옥스퍼드 셔츠의 몰골은 처참했다. 중구난방으로 튀어 오른 김치 국물 자국은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으로 위장하기엔 예술성이 턱 없이 부족했고, 시큼한 오렌지빛 컬러는 일부러 염색된 것이라 우길 수도 없을 만큼 고춧가루 색채가 진하게 풍겼다.


실장실로 돌아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식당에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이건 분명 내 잘못이 아니야. 아무리 핸드폰을 찾느라 손을 더듬었다 해도 그릇이 떨어질 만큼 몸놀림이 과격하지는 않았단 말이지. 백 번 양보해서 내가 그릇을 엎었다 치자. 그래도 왜 내 몸 위로 떨어지냐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아무래도 이 안에 범인이 있어. 샅샅이 뒤져서 꼭 밝혀내고 말 테다.'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야!!!!


우선 한 팀장부터 호출해 알아보기로 하고, 내선번호를 눌렀다.


"한 팀장, 지금 바로 내 자리로 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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