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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사대제 Feb 12. 2024

악마들의 전쟁: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04

유대와 아랍의 끝없는 분쟁

표지 사진: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는 초대 수상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은 아랍인들에게는 알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다. / 출처: Wikipedia, <Israel>





제 3 장  시오니즘(Zionism) 운동으로 부활한 유대와 아랍의 분쟁



세월이 흘러 19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주 초기 유대인들은 아랍인들로부터 돈을 주고 토지를 사들이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정착지를 마련했다.(영국의 대부호였던 월터 로스차일드 종남작(Walter Rothschild, 2nd Baron Rothschild, 1868~1937)이 이주 유대인들의 초기 정착금을 후원하였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사들인 땅은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황무지였다. 


왼편: 시오니즘 운동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 오른편: 시오니즘 운동의 후원자, 월터 로스차일드 종남작 / 출처: Wikipedia, <Zionism Movement>


아랍인 지주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쓸모없는 땅을 유대인들에게 시세에 몇 배에 해당하는 값에 팔아 폭리를 취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묵묵히 토지를 사들였고, 혼신을 다해 불모지를 개간해 농경지를 일구고 해안가를 따라 텔아비브(Tel Aviv), 야파(Jaffa) 등의 대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애꿎은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보다 더 효율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키부츠(kibbutz)'라는 제도를 고안해 도입했다. 키부츠는 유대인 정착민들이 모여 토지를 공동 구매하고 공동 경작해 수확물을 나눠 갖는 사회주의 시스템에 따라 운영되는 집단 농업 공동체였다. 물론 키부츠는 군사적인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는 제도였다. 외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면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뭉쳐있는 편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아랍 소작농들 입장에서는 지주가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면 그저 지주의 이름이 달라질 뿐 자신들의 처지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유대인 이주민들이 아랍인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면 키부츠 제도 때문에 아랍 소작농들은 소작을 떼이고 거주지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유대인들에게 고액에 땅을 팔아 폭리를 취하는데 맛을 들인 아랍인 지주들은(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부재지주(不在地主)였다.) 아랍 소작농들의 곤궁한 처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유대인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비싼 값에 땅을 파는 데에만 골몰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고 토지 매입이 증가할수록 가난한 팔레스타인 소작인들의 소외는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그럴수록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더욱더 유대인 이주민을 경계하고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유대와 아랍 두 민족 간에 해묵은 갈등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1931년 15만 명(팔레스타인 지역 총인구의 약 6%)에 불과하던 유대인 인구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전 65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 UN 분할안에 따른 팔레스타인 지도 / 출처: 위키백과, <이스라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고 그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과 아랍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UN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승인했다. 팔레스타인을 세 지역으로 나눠 유대국가(약 14,080㎢)와 아랍국가(약 11,500㎢)를 각각 세우되 예루살렘(Jerusalem)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로 만든다는 중재안이 1947년 11월 29일 UN 총회에서 표결에 부쳐져 찬성 33표, 반대 13표, 기권 11표로 가결되었다. 


UN의 결정을 유대인들은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아랍인들이 UN의 결의안을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랍인들은 인구 면에서 월등한 자신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적은 땅을 배정받은 것은 불공평하다며 극렬 반발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땅의 면적을 떠나 양측에 배정된 지역의 내실을 살펴보면 이야기는 정반대가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한 수원(水原: 물이 있어야 경작이 가능하다.)인 요르단 강 유역과 중개 무역의 중심지로서 이미 상당 부분이 도시화되어 있던 가자지구는 모두 아랍인들 차지였고, 유대인들에게 배정된 땅은 대부분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네게브 사막 / 출처: Wikipedia, <Negev>

유대인들이 피땀 흘러 건설한 텔아비브, 야파 등 해안 도시들이 위치한 가자지구 위쪽의 지중해 연안을 제외하면 유대인들에게 배정된 땅의 대부분은 지금도 사람이 살지 못하는 네게브 사막(Negev desert: 현재도 이스라엘 국토의 약 60%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지대였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단독국가 수립이나 예루살렘 관할권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만족해했다. 유대인들은 단지 그들이 발붙이고 살 한 줌의 땅을 원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全지역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아랍인들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땅을 파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아랍인들은 제1차 중동전쟁(1948 Arab–Israeli War, 1948년 5월 15일 ~ 1949년 3월 10일)이 발발하기 불과 6개월 전까지도 유태인들에게 땅을 파는데 혈안이 돼있었다. 그들은 시세보다 몇 곱절 비싼 값에 땅을 팔면서 "저 머저리 같은 유대인들이 곧 다시 빼앗길 땅을 비싼 값을 내고 산다."며 유대인들을 비웃었다. 




훗날 전개된 역사의 결과를 살펴보면 그 당시 아랍인들의 선택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판단착오에다 무모한 도박(all or nothing)이었다. 만약 1948년에 아랍인들이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합친 것의 약 두 배 면적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대와 아랍 간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자 1948년 5월 1일 아랍인들이 먼저 군사행동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유대인 정착촌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악명 높은 ‘데이르 야신 학살 사건(Deir Yassin massacre, 1948년 5월 9일)이 벌어졌다. 이르군(Irgun: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결성된 유대인 테러 조직) 조직원 약 130명이 데이르 야신이라는 이름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습격해 비무장 민간인 107명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혹하게 학살한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이르군과 또 다른 유대 테러 조직 스턴갱(Stern Gang)은 팔레스타인 마을 알 다와이마(al-Dawayima massacre, 1948년 10월 29일, 약 120명 사망)와 아부 슈마(Abu Shusha, 1948년 5월 21일, 약 70명 사망) 등지에서 유사한 형태의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리고 ‘되로 받고 말로 되갚는’ 이스라엘의 對팔레스타인 전술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유대와 아랍 양측은 팔레스타인 내전에서부터 제1차 중동전쟁 기간 내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복수전을 주고받았다. 

     

팔레스타인 내전은 곧바로 주변 아랍국들의 군사행동으로 이어졌고, 유대인들은 독립의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곧바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5월 14일 UN이 정한 시한이 되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고, 미국, 소련, 영국 등 세계 주요국들이 신생국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그러나 인근 아랍국들은 달랐다. 이스라엘 건국 선언과 동시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5개국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더러운 유대인들을 모조리 때려잡아 지중해 바닷물 속에 쓸어 넣어버리자!"가 아랍연맹의 개전(開戰) 구호였다.) 유대계와 아랍계 주민들 간의 내전이 이스라엘과 아랍연맹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왼편: 건국이 선포되자 이스라엘 국기를 계양하며 환호하는 유대인들, 오른쪽: 제1차 중동전쟁 전투도 / 출처: Wikipedia, <1948 Arab–Israeli War>


전쟁이 발발하자 세계는 아랍 측의 일방적인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상을 뒤엎고 아랍 전체와 맞서 싸운 전쟁에서 당당히 승리했다. 투철한 민족정신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100년도 더 된 골동품 대포(cannon)까지 동원하고 총 한 자루를 두 명이 돌려써가며 결사항전을 벌여 결국 전세를 뒤집어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 인구는 약 1억 4천만 명인데 반해 유대인은 고작 65만 명이었다. 유대인들은 무려 216배의 인구를 가진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 더구나 아랍연맹군은 전투기와 탱크로 무장한 정규군이었고. 이스라엘군은 중화기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병대였다. 세계는 이 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라고 부르며 단 며칠 만에 아랍 측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전쟁은 무려 10개월이나 지속됐고 결국 1949년 3월 아랍연맹이 굴복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를 오직 정신력만으로 극복해 낸 것이다.




<제 4 장  아랍과 이슬람의 왜곡된 유대인 관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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