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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사대제 Feb 08. 2024

악마들의 전쟁: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03

유대와 아랍의 끝없는 분쟁

표지 사진: 610년 메카 근처 히라산 동굴 속에서 지브릴(기독교명: 가브리엘) 大천사(archangel)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14세기에 그려진 그림), 무함마드에 의한 이슬람 개창은 1,400년이 넘는 유대와 아랍 분쟁의 기원이 되었다. / 출처: 위키백과, <무함마드>





제 2 장  유대와 아랍 분쟁의 기원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을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찾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알 나크바(al-Nakba)’라고 부른다. 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이다. 


아랍인들은 서아시아가 겪고 있는 갈등과 고통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아랍인들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은 서방 세력을 등에 업고 서아시아에 들어와 박힌 식민세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에는 유대와 아랍 두 민족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원한과 갈등은 결코 최근의 일이 아니다. 두 민족 사이엔 최소 1,400년 가까운 해묵은 원한이 있다. 


철천지원수처럼 다투는 유대인과 아랍인은 그 기원을 따져보면 놀랍게도 서로 사촌지간이다. 두 민족은 같은 셈족 계통으로 아브라함(Abraham)을 공통의 시조로 여긴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본처 사라(Sarah) 소생의 이삭(Isaac)과 이집트 출신의 후처 하갈(Hagar) 소생의 이스마엘(Ishmael: 이삭의 이복형)이 그들이다. 훗날 이삭은 유대인의 시조가 되었고,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갈등의 시초는 신(神)이 둘 중 누구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는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Bible)과 꾸란(Quran)에는 상반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경에는 신이 이삭에게 정통성과 함께 가나안(Canaan) 땅에 대한 소유권을(출처: 구약성경 <창세기> 17:19, 17:21, 21:12, 26:3-4, 26:24, 28:13, 35:12, 50:24), 이스마엘에겐 은혜와 축복을(출처: 구약성경 <창세기> 16:10-12, 17:20, 21:13, 21:18) 각각 내려주었다고 나와 있다. 이 성경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제시하는 이스라엘 건국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꾸란에 기술된 내용은 다르다. 신이 선택한 인물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었으며, 나중에 아브라함에 의해 신에게 제물로 받쳐질 뻔했던 것도 이스마엘이라고 한다.(출처: 꾸란 37:101-107(사파트 수라 101-107 아야) 이슬람의 두 번째로 큰 축제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이슬람의 희생절, 이슬람력 12월 10일)는 이스마엘의 성스러운 희생을 기념하는 축제다. 이스마엘은 장성한 후에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메카에 사원을 지었다. 이 사원이 바로 이슬람 제일의 성지 알 카바(al-Kaaba) 사원의 시초다. 


왼편: 구텐베르크 성경 초판본, 출처: 위키백과, <성경> / 오른편: 9세기경의 꾸란(the Reza Abbasi Museum 소장), 출처: Wikipedia, <Quran>


신이 부여한 정통성을 놓고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각각 무리를 이끌고 갈라서기는 했어도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등장해 이슬람을 전파하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오랫동안 두 민족은 별다른 갈등 없이 서아시아 지역에서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이슬람 초기엔 무함마드도 한동안 유대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함마드는 헤지라 이후 메디나에 정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를 ‘성서(聖書)의 백성들(the People of the Book)’이라 부르며 타 종교 신자들보다 우대했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에게 유대인 문제는 조만간 꼭 풀고 넘어가야만 할 숙제였다. 유대교의 기본 틀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슬람을 개창한 무함마드는 아브라함 이래 누대에 걸쳐 유대인에게만 축복을 내렸던 신이 하루아침에 축복의 대상을 유대인에서 아랍인으로 바꿔버린 데 대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해야만 했다. 


꾸란에 등장하는 25명의 예언자 중 무함마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대인이다. 이삭, 야곱, 다윗, 솔로몬, 모세, 요한 등은 성경의 기둥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받은 마지막 예언자라는 자신의 지위와 이슬람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신에게 불복하고 대죄를 지어 신이 축복을 거둬들이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이 타락을 거듭하자 신은 마지막으로 예수(이슬람명: 이싸)를 보내 그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타락을 멈추지 않자, 결국 대로한 신은 그동안 베푼 은총을 모두 거둬들이고 천벌을 내려 유대인들을 돼지와 원숭이로 바꿔버렸다."라는 주장을 펼쳤다.(출처: 마크 A. 가브리엘 지음, 4HD 옮김, <<이슬람과 유대인: 그 끝나지 않은 전쟁>>, 글마당, 2009. P.37) 


그러나 꾸란을 아무리 뒤져봐도 인간성을 박탈당할 만큼 신을 진노하게 만든 유대인들의 대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과 순나(Sunnah)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순나란 무슬림들이 지켜야 할 종교적 관습과 규범을 의미한다. 하디스는 이슬람 교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종교서이다. 무슬림들은 하디스를 꾸란에 버금가는 신앙의 길잡이로 여긴다. 그리고 하디스는 꾸란과 더불어 샤리아(Sharia: 이슬람 율법)의 가장 중요한 법원(法源)이기도 하다.)에도 유대인들이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결과만 명기되어 있을 뿐 그 원인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메카(Mecca)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무함마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메카의 유력자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린 무함마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조력자였던 아부 바크르(Abū Bakr, 573~634)와 함께 무하지룬(Muhajilun: 아랍어로 '이주한 자'라는 뜻이다. 622년 무함마드를 따라 메카를 탈출해 메디나로 이주한 최초의 무슬림들을 일컫는다. 이들을 무함마드를 받들고 메디나에 최초의 움마(Ummah: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해 이슬람의 기초를 닦았다. 무하지룬은 오늘날까지 모든 무슬림들에게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70여 명을 이끌고 622년 7월 16일 한밤중에 메카를 탈출한다. 


Masjid al-Haram in Mecca / 출처: 나무위키, <메카>


무함마드 일행은 고된 여정 끝에 아라비아 반도 북부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야스리브(Yathrib)에 도착한다. 이 사건이 바로 이슬람교의 기원이 되는 ‘헤지라(Hejira, 聖遷)’다. 


당시 야스리브에는 다양한 종족이 뒤섞여 살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무리는 3개 부족(카이누카(Qaynuqa), 나디르(Nadir), 쿠라이자(Qarayzah) 이들 3개 부족은 각각 624년, 625년, 627년에 무함마드가 이끄는 무슬림들의 공격을 받고 잔혹하게 살육당해 결국 멸족하고 말았다.)으로 이루어진 유대인들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상권을 놓고 메카와 경합 중이던 야스리브의 부족들은 메카의 적이었던 무함마드 일행을 별다른 경계심 없이 받아들였다. 야스리브에 정착한 무함마드 일행은 야스리브의 기득권층과 타협해 가며 드러나지 않게 세력을 키워갔다.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쳐 이슬람교를 확산시키는 한편 군비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세력을 키우기 위해 무함마드는 야스리브 인근을 오가는 메카의 대상(隊商)을 약탈함으로써 군자금을 마련했다. 무함마드는 원주민 부족 간의 분쟁을 중재하고 약탈한 재물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야스리브 기득권층의 환심을 샀다. 


대상에 대한 약탈이 잇따르자 메카 측은 군대를 동원해 무함마드 세력을 토벌하려고 했다. 624년 3월 바드르(Badr) 계곡에서 메카군은 무함마드 측과 치른 첫 번째 대규모 전투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참패한다. 이 전투를 통해 무함마드는 일약 야스리브의 유력자로 떠오른다. 


이때부터 무함마드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불과 1년여 만에 야스리브의 지배권을 손아귀에 넣은 무함마드는 도시명을 야스리브에서 '예언자의 도시'라는 의미의 '마디나트 안 나비(Madīnat an-Nabiy, 일명 메디나)'로 바꾸고 ‘아라비아에는 두 종교가 있을 수 없다. 아라비아는 오직 이슬람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Al-Masjid an-Nabawi in Medina / 출처: 나무위키, <메디나>


메디나(Medina)에서 이교도에 대한 관용도 사라졌다. 이교도들은 이슬람에 복종해 지즈야(Jizyah: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바치는 인두세)를 납부하거나 세금을 낼 여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강제로 군역을 져야 했다. 이를 거부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 했다. 


바드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메카군은 메디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627년 무함마드는 메카군의 공격을 받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메카군은 메디나를 40일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결국 메디나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참호 전투) 


메카군이 물러간 후 메디나의 유대인들이 메카군에 내응 한 것이 드러나자 격분한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보복을 가했다. 무함마드의 명령에 따라 무슬림들은 유대인 남자들을 남김없이 참수해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유대인들의 재산은 철저히 몰수되었다. 


왼편: 바드르 전투을 지휘하는 무함마드, 오른편: 참호 전투 후 배신자를 처형하는 무함마드 / 출처: 나무위키, <무함마드>


이 사건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영원히 갈라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과연 메디나의 유대인들이 배신자였는가에 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유대인들은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민족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헤지라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격이다. 야스리브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유대인 정착지로 실질적으로 유대인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무함마드가 무리를 이끌고 나타나 도시의 이름을 메디나로 바뀌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라고 주장했지만 헤지라가 단행될 무렵 무함마드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메카의 광신자(狂信者: 무함마드를 박해한 메카의 유력자들은 무함마드를 광신자 혹은 미치광이라고 매도했다. 메디나 원주민들 중에도 무함마드를 적대시한 무리가 있었는데, 무슬림들은 이들을 무나휘쿤(Munawhikun: 불경스러운 자들)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일 뿐이었다. 


메카와의 갈등 역시 유대인들에겐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었다.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고 메카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제 동원하는 무함마드가 유태인들에겐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메카군이 메디나를 포위하자 유태인들은 이 기회에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적 요소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타 종교와 차별화하기 위해 유대교와 기독교의 안식일인 토요일과 일요일을 버리고 금요일을 안식일로 삼았으며 예루살렘을 향하던 기도의 방향도 메카로 바꿨다.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는 종을 치고 유대교는 뿔피리(쇼파, Shofar)를 부는 관습이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이교도의 관습을 타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슬람은 오직 육성(肉聲)으로만 기도시간을 알리게 했다. 이것은 나중에 미나네트(Minanet: 이슬람 사원 주위에 서 있는 첨탑)와 아잔(Azan: 하루에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무앗진(Mu'adhdhin: 아잔을 외치는 사람)이 미나네트에 올라 외치는 육성 시보(時報)다.)의 유래가 되었다. 


노트르담 종소리는 멈췄지만… 전 세계 성당들 '타종 결속' [MBN 뉴스 8] 2019-04-19


쇼파를 부는 유대 청년 / 출처: Wikipedia, <Shofar>


Mevlan Kurtishi - Azan (Call to Prayer)


이때부터 유대인은 이슬람의 영원한 적으로 낙인찍혔다. 이슬람의 박해가 이어지자 유대인들은 점차 서아시아 지역을 떠나거나 개종을 통해 이슬람으로 흡수돼 갔다. 유대인이 서아시아 지역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자연스레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도 소멸되었다.




<제 3 장  시오니즘(Zionism) 운동으로 부활한 유대와 아랍의 분쟁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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