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돼지의 탈출
비가 올 때면 종종 생각이 난다.
이제는 거의 30년이나 지난 일이다 보니 세세한 부분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서 재구성을 해보자면..,
1995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장마로 인해 무너진 부대 인근의 축사(畜舍)들을 수리해 주고 이에 대한 답례로 주민들로부터 부대 회식 용으로 늙은 돼지 한 마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회식 이틀 전에 탈출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제대가 얼마 안 남은 나 같은 말년 병장들이 리더가 되어 4개 팀으로 조를 나누어서 수색을 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팀들이 부대 뒤 인근 야산이나 앞에 흐르는 작은 냇가를 따라 수색을 하거나 혹은 이 녀석이 자유를 찾기 위해 북으로 간 게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을 내놓는 팀도 있었다.
당시, 내 기억엔 갓 입대한 취사병 한 명과 마침 그날 일이 없어서 쉬고 있는 정비병 두 명을 데리고 수색을 시작을 했고 결국 4시간 만에 1Km 나 떨어져 있는 인근 부대의 짬통을 뒤지고 있는 녀석을 발견해서 데리고 왔다. 이로 인해 잠시나마 부내에서 영웅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만약, 우리 팀마저 탈출 한 돼지를 회수 못했으면 아마 고기도 없이 짬밥과 무 국 그리고 막걸리만 갖고 부대회식을 할 뻔했으니까.
그때 우리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단순히 그 상황에서 가장 쉬운 길을 택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입장'에서 탈출 경로를 고민했던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생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추적 경로를 예측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들 산으로 계곡으로 올라가고 있었기에 우리마저 산으로 간다면 반대쪽인 민가나 인근 부대 근처는 전혀 수색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빨리 갔다 와서 낮잠이나 한숨 자자는 마음이 더 크지 않았나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자 대원들은 크게 기뻐하며 나를 따랐다. 그들은 내 결정을 마치 천재적인 선택인 양 받아들였고, 덕분에 우리의 수색 방향은 다른 팀들과 완전히 달라졌다. 결과적으로, 근처 민가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였고, 다른 어느 팀보다 빠르게 수색 임무를 끝낼 수 있었다. 어쩌면 단순했던 그 선택이, 그날의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장마철만 되면 가끔 생각이 난다.
만약 우리 팀마저 산으로 갔으면 그 녀석은 조금이나마 삶을 연장했거나 아니면 정말로 북으로 건너가 영웅대접을 받았을지 모른다.
녀석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내 결정은 확실히 해피엔딩은 아닌 것이다.
앙모키오(Ang Mo Kio) 우리 집에서
August 12,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