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을까?
본격적으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나는 스스로 나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상황을 판단할 정신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지난 일들이 내게 남긴 상처가 아물 새도 없었고, 스스로 상처 받았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워낙에 단순하고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서 더 스스로를 살피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지난 시간 동안 어땠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일주일 동안 있었던 웃긴 일들에 대한 말만 했다. 그나마도 오래 말하면 의사에게 민폐가 될까 싶어 다 괜찮고 즐거운데 가끔 슬프네요, 그런 말만 했다.
반년 전에는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법적으로 따지자면 강제추행/유사강간에 속할 법한 일들을 내게 저질렀고, 끊임없이 심리적 지배를 시도했고 거부하기 시작하자 집요하게 속박하려 했구요, 외출할 때마다 우연히 마주치게 될까 봐 무서워요. 요즘에는 오랜 시간 외면하던 배우자의 외도를 직면하고 화병이 난 엄마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화내고 욕하고 수 시간 쉬지도 않고 때리기만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저항 없이 맞는 것뿐인데 엄마는 그게 더 화가 난다고 더 때리고요. 학교는 쉬고 있고요, 아르바이트하는 시간 외에는 그냥 집에 있거나 나가서 술 마셔요. 솔직히 분노도 슬픔도 없고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어요. 순간순간의 자극적인 일들만 쫓아요. 몸속에서 뭔가 치미는 느낌이 들면 칼을 찾아서 손목을 그어요. 그거 말고는 진정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사실 정말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때 내 상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어했기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일들이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 괴로움의 이유들을 알지 못하고 괴로워만 했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하는 것만이 돌파구였다. 정말로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내게는 그 일들이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믿었다. 격심해진 우울과 불안은 그와 별개의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우스갯소리만 했다. 이제와서야 나는 안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픈 이유를 알아야 한다. 고통은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고, 그를 복기하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상처가 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마주 보고 도려낼 줄 알아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에 나는 그 해 겨울까지 공연히 효과도 없는 약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