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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an 05. 2024

마주하는 법

사랑에 대하여 2 : 최은영 <밝은 밤>을 읽고

가족 이야기에는 더욱 쉽게 감동을 받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밝은 밤>을 읽는 동안 울컥했던 장면이 많았던 것 같다. 백 년 전, 그 시절의 삶은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주인공에게, 현재의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책은 2017년 1월, 서른두 살이 된 ‘나’(지연)의 이야기를 다룬다. 남편의 외도로 인하여 이혼을 하게 된 ‘나’는, 희령의 천문대에 연구원 채용공고를 본 뒤 서울에서의 삶, 가족, 일로부터 도망가듯 희령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어릴 때 본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할머니(영옥)을 만난다. ‘나’는 할머니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할머니 댁을 방문하고 거기서 옛날 사진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본인이 할머니의 엄마인 증조모(삼천)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이후로 증조모에게 왠지 모를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증조모, 할머니, 그리고 나의 어머니(미선)의 이야기를 들으며 본인의 서른 두 살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장편 소설인 만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도 많아 쓰고 싶은 것은 많지만 다 쓸 수 없음에 아쉽게 생각한다. 딱 하나 가장 쓰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면, 아니 이 책을 읽은 후 가장 써야 할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주인공인 ‘나’, 바로 지연의 성장이지 않을까 싶다.


이 가족의 여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본인의 어머니와, 그리고 본인의 딸과 지독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증조모도 증조모의 아픈 어머니를 두고 다른 지역으로 이민을 간 것, 할머니도 할머니의 남편에 대해서 증조모와 갈등이 있었으며,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나’(지연)도 어머니와 갈등이 있었다.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식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어머니와, 그것에 지친 ‘나’의 갈등이었다. 그 갈등은 ‘나’의 이혼으로 색이 더 짙어진다.


‘나’에게 전 남편은 결핍 그 자체였다. 애정을 받지도 못했고, 그로 인해 줄 수도 없었으며, 시어머님의 구박에 위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한 뒤에는,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의 이혼을 부끄러워했고, 전 남편의 편을 들기도 했다. 끝까지 전 남편은 ‘결핍’이라는 감정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나’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인생관이었다. 참으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어머니가, ‘나’에게 준 것은 상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체념’은 어머니의 무기였다.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라고 생각할 만큼 어머니는 힘든 일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으며 그것을 통해 ‘평범’해지고자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원하던 평범한 인생을 위해 평범하지 않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강요하는 어머니를 연민했으며, 동시에 원망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어머니의 옛날이야기를 할머니로부터 들으며 알게 된다. 어머니가 어째서 그토록 ‘체념’을 강요하였는지, 특히 ‘가족’이라는 구조를 왜 그렇게 유지하려 애썼는지, 어머니의 아버지인 할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깨닫게 된다. 어머니의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가족을 떠났는지, 평생을 어머니의 자식으로 살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 후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p. 314)


‘나’는 어머니와 갈등을 풀어가면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삭히며 살아왔는지. 그러면서 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서서히 마주 보게 된다. 결국은 시발점이 되었던 그 이혼에 대해서, 그녀는 다시금 돌아본다.


전 남편은 “시간은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했다. 시간이 과거로부터 흘러나와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것, 얼어붙은 강물은 그것을 의미했다. 그 말을 이전의 ‘나’는 얼어붙은 강물 위에서 전 남편의 외도가 ‘일어날 일’이었다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였다. 그 얼어붙은 강을 다시 녹이는 것은 증조모로부터 백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흘러가야 하는 것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책의 마무리에는 보이저 1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보이저 1호 내부에 ‘지구’를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이미지와 소리가 암호화되어 있는 삼십 센티 크기의 골든 레코드가 들어있다고 한다. 동시에 ‘나’는 한 사람에 대한 레코드를 만드는 것에 대한 상상을 한다. 그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와 소리가 담겨 있는 레코드. 그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고, 사람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것을 특별하게 만들 것이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연이 사랑하지 못한 대상은, 지연 역시 그 대상 앞에서 본인을 사랑하지 못했다. 전 남편 앞에서는 본인의 아픔을 체념으로 일관했고, 부모님 앞에서는 일그러진 복수심이 본인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결국 책의 마지막이 되고 지연은 지연을 마주 보고 사랑하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 속의 어딘가에 있는 ‘나’는 사라지지 않고 결국 돌고 돌아 그 자리로 온다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관심을 바라고 있다는 것. 그들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by.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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