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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19. 2021

동양 문명을 끌어당긴 일대 선택

쌀과 밀이 가른 초반 레이스

  인류가 최초로 농경에 성공해 정착을 이룬 성공 사례는 약 1만 년 전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성취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은 오늘날의 중국과 미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도 서서히 수렵과 채집을 포기하고 농업으로 전향해 갔다. 그들 중 유의미하게 집단의 번영에 도달한 케이스가 현대에 이르러 세계 최초의 4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지역이 동일한 형태와 비슷한 속도로 사회 진화를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토지와 기후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수렵-채집이나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 갔으며, 농업으로 노선을 바꾼 많은 그룹 중에서도 빠르게 선두로 치고 나가서 이웃들에 비해 더 성숙한 문명을 구축한 곳들이 등장했다. 자신들이 일궈낸 성과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중화(中華)',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와 같은 자찬이 담긴 프레이즈를 만들어낸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같이 번영했던 시대로 연대기를 되돌리면, 우리는 2000년 전에 중국과 유럽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연대표를 거슬러 올라 처음부터 세계사를 탐독한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몇천 년 늦게 발생한 중국 문명이
어떻게 고대에 서쪽 문명보다 더 강성해질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은, 일견 사소해 보이는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동아시아 지역은 메소포타미아나 나일 강 유역에 비해 강수량이 많다. 건조한 기후대의 사람들이 벼라는 옵션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습윤한 기후대의 사람들은 밀과 쌀이라는 두 가지 옵션을 놓고 선택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양 기후대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문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을 끼고 살았던 이들은 밀을 재배함과 동시에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규모 있는 목축을 겸업해야 했다. 반면 황허와 양쯔강 인근에서 지냈던 이들은 벼농사에 전념하며 최대한 많은 농업 생산량을 거두는 것에 집중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밀 문명과 벼 문명의 차이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양 진영 모두 농업 사회로 진입하면서 관개와 경작에 필요한 도구를 발전시켰지만, 밀은 벼만큼 폭발적으로 잉여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식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벼는 압도적인 인구 부양력을 바탕으로 중국 중심의 동양 문명이
빠르게 세를 확장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풍부한 인구 증가 여지와 잉여 생산물 축적이 이루는 사이클로 말미암아, 중국에서는 이른 시점부터 철저한 수직적 위계와 넉넉한 경제력을 갖춘 국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인구 규모는 도시와 국가의 국방력 및 경제력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잉여생산물을 창출할 수 있는 지역이라면 어디에서든 국가가 발흥할 수 있었기에, 중국에서는 대륙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강국들이 경합하는 춘추전국시대라는 현상이 무려 3천 년 전에 발생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막 걸음마 단계에 진입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시리아 왕국의 원톱 체제가 이어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실로 엄청난 격차였다. 국가들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경합하면서 중국 왕조들은 경쟁력을 신속하게 다져 나갔다. 메소포타미아보다 철기의 도입이 1000년이나 늦었지만, 이러한 기술력 격차는 무서운 속도로 좁혀졌다.


  중동에서는 기원전 1500년 경에 히타이트가 철기를 앞세워 인근 지역을 평정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전국시대에 철기가 도입되어 국가 간의 불꽃 튀는 혈투에 기름을 부었다. 특히 매일매일이 사투였던 중국에서는 가마 속 온도를 최대로 끌어올려 더 강한 강도의 철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세계 최초의 주철 생산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철기의 도입 시점은 늦었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압박 속에서 기술 개발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로 중국인은 문명 레이스에서 역전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는 몇백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파멸적인 전쟁기였지만, 그러한 난투 속에서 국가가 살아남을 방법을 정교하게 갈고닦음으로써 시황제의 위업이 완성될 수 있었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제자백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제국을 운영했고, 국가 운영의 정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망을 정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서양 문명의 대표 주자인 로마 제국도 브리튼 섬부터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며, 상하수도를 완비하고 언어와 도량형 및 종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고도의 문명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이 진(秦) 건국 이후 서양 문명보다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로마는 탁월한 국가 정비 능력으로 카르타고 등의 경쟁자를 차례로 쓰러뜨리며 500년 가까이 유럽 본토에서 패권 국가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중국에서는 강력한 통일 왕조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여러 국가로 분열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최초의 통일 제국 진은 20년을 버티지 못했으며, 그들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통치 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 한(漢) 역시 약 200년 만에 쓰러지면서 왕조 단명의 운명을 끊어내지 못했다. 심지어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대륙 분열기가 300년이 훨씬 넘도록 지속되기도 하였다.


  사회 엘리트가 왕이 되고, 그가 다시 황제로 격상되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해도, 드넓은 영토를 확고한 1인 지배 하에 두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중앙의 힘이 약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지방 호족들과 변방 유목 민족들이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이러한 패권 경쟁 구도는 제국의 반복적 분열로 이어졌고, 각국이 경제력과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스템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할 것을 요구했다.


끝모를 난전상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여겨졌겠지만,
문명의 발달에는 소중한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철기가 도입된 이후로 우경과 깊이갈기가 현실화했고, 2모작이 가능한 벼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농업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잉여생산물은 경제 터빈을 끊임없이 돌리면서 국가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농경 사회의 급격한 성장에 발맞추기 위해, 유목 민족도 교역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기병의 파괴력을 계속 강화해야 했다. 생존 경쟁의 끝에는 압도적 강자만이 존재하는 리그가 남게 되었다.


  일정 이상의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상대라면, 경쟁에 이골이 난 동방의 국가들과 감히 겨룰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훈족의 대이동은 당시 세계의 힘의 균형이 어디로 기울어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다음 생활 터전을 두고 행선지를 고민하던 그들은, 동쪽의 중국이 아닌 서쪽의 로마 방향을 겨냥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유럽을 초토화시키고 원주민을 영역 밖으로 떠밀어 로마 제국에도 연쇄적인 데미지를 가했다. 4세기 무렵, 동아시아는 다른 문명에 비해 높은 단계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문명 레이스의 선두는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국가를 전부 합친 것보다 면적이 넓지만, 사람이 주로 거주해 온 곳은 중부와 동부 연안 지역이다. 이 일대에는 험준한 산맥이 놓여 있지 않아 사람이 오가는 데에 제약이 크게 없었고, 오히려 폭이 넓은 강이 두 줄기나 있어 원거리 이동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개방적인 지리 조건은 중국사에 두 가지 방향으로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목적만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점은 문물 교류를 촉진시켰으며, 거래의 효율이 좋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여지도 충분했다. 다소 건조한 북중국과 습윤한 남중국은 생산물에도 차이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오갈 만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다. 수 양제 시기에 건설된 대운하는 남북 교류의 거래비용을 크게 감축함으로써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으로 평탄한 지역 조건은 상선뿐 아니라 군대의 이동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다.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북중국과 남중국의 왕조들은 언제든지 양쯔강과 황허를 넘을 용의가 있었다. 이들이 맞붙을 때마다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흘린 피는 동양 문명 일대 도약의 형태로 돌아왔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 인구가 끊임없는 기술 발전을 자극했고, 그것은 중국의 4대 발명으로 일컬어지는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이라는 독창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거대한 역전 현상을 돌아보면서, 다시금 세계사에서 작은 차이가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5천 년도 전에 각 지역의 사람들이 선택한 작물의 종류는 문명의 성장 속도 차이로 직결되었다. 벼는 인간에게 밀보다 폭넓은 기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치열한 집단 경쟁을 유발하여, 동양 문명이 초반 스퍼트를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잉여생산물이 있고 나서야 인간의 목표가 생존에서 기술과 문화 발전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문명의 진보는 그러한 타깃 변경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2천 년 전 역사라는 무대에서 일어난 경주를 되새겨 보면서 경제사의 중요한 진리를 재확인할 수 있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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