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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07. 2022

유럽연합의 그림자를 들추어낸 빚

유럽 재정위기와 길어지는 경제 부진

  어릴 적 세계지도에서 유럽 연합이라는 말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개념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각 나라의 국기, 수도 같은 것들이 멀쩡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해서 국가 간의 연합체라는 것이 정의된 것인지, 어떻게 그것이 작동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버거웠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나라들이 힘을 합친다면 더 강해지고 좋은 것 아닌가?' 하는 1차원적인 생각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유럽연합(이하 EU)은 세계 3대 경제권을 이루는 중심지 중 하나이며, 세상에 막강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비록 최근 주요 가맹국이었던 영국이 국민 투표를 통해 이탈하는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여러 국제적인 논의에서 EU의 입김이 강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세계 기준으로 놓고 보아도 제3, 제7의 경제 대국인 독일과 프랑스가 속한 기구가 EU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EU이기도 하다. 그들은 유럽을 하나의 거대 공동체로 만들어 정치적·경제적 공영을 이루고,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선도적인 집단이 되어 여러 모로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여러 국가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최근 러시아의 행보에 대한 각국의 의견 불일치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경제 규모에서 중국에까지 밀리는 미래를 EU가 계획하고 있었을 리 없다. 20년 전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출발한 EU의 계획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틀어진 것인가. 그 대답의 대부분은 지난 2010년대에 그들이 보여줬던 횡보에 포함되어 있다. 유럽이 흔들린 이유 역시 빚이었다.




처음 그리스가 유로화를 단일통화로 쓰는 유로존에 가입한 것은 크나큰 행운으로 여겨졌다. … 하지만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하기 위해 국채를 더욱 발행하면서도 세계 최대의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와 스와프 계약과 분식회계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국가부채를 낮추는 편법을 썼고, 게다가 고금리 국가였던 그리스가 유로존의 단일금리 정책을 받아 들이게 돼서 금리를 대폭 낮추는 정책을 도입했다.
(황상무 著 『글로벌 경제위기와 인간군상』, 아이택스넷, p.250)


  유럽 통합을 이끌겠다는 야심을 가진 EU에 올라타기 전부터 그리스는 채무 문제를 안고 있었던 나라였다. 산업을 복합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실패해 경제의 장기적인 경쟁력에 결함이 있었으며, 민간이 흡수하지 못한 고용을 공공 부문이 받아들이고 높은 수준의 복지를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재정적자가 일어나면 그것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였고, 원래대로라면 유로존 가입이 힘든 상황이었다.


  빚을 내서 재원을 조달하려는 그리스 정부는 낮은 금리로 채권을 팔 방법이 필요했는데, 이때 골드만삭스가 접근해 수수료를 받는 대신 유로존 가입을 도와줄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솔깃한 거래를 제안했다. 결국 빚을 장기적으로 더 싸게 조달하려는 유혹에 넘어간 그리스가 통화 스와프와 분식회계로 장부상 국가 부채를 낮추는 속임수를 쓴 끝에, 유로존에 새 식구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임시방편이 세상에 민낯을 드러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로화 도입으로 그리스의 화폐 가치가 뛰어올라 수출 경쟁력이 더욱 하락한 데에 이어, 미국발 금융위기로 자국이 내세우는 관광업이 수축하면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모두 심각해지는 '쌍둥이 적자' 문제가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리스의 신용등급에 결정타를 가함으로써, 빚으로 재원 조달을 하는 것마저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페인 소위 선진국 그룹에 속한 유럽의 나라들도 빚 때문에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 피치는 유럽 국가들의 GDP 가운데 거의 5분의 1 가량이 부채 비용조달에 들어갈 것이며, 이탈리아와 프랑스, 아일랜드 같은 국가는 그 비용이 4분에 1에 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배선 著 『빚 경제학』, 청림출판, p.284)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국가들도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었다. 특히 서유럽과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의 일부 항목을 적자 계산에서 제외하고, 금융기관과의 파생 상품 거래로 빚을 교묘하게 숨기는 방식으로 갚아야 할 금액을 축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수록 불어나는 적자 살림은 결국 그들의 신용도를 떨어뜨렸고, 그로 인한 국채 금리 상승이 그들을 위기로 몰아세웠다.


  시중 국채 금리가 6%를 넘어가자, 결국 PIIGS라 불리는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이 차입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줄줄이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중앙은행(이하 ECB)이 일방적인 자금 지원만으로 5개국을 일으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ECB 측은 구제금융과 함께 이들 국가에 확실한 재정 긴축 의지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재정위기가 터진 시점에 재스민 혁명으로 인한 중동의 정세 불안으로 유가상승 압력을 받고 있었기에, 인플레이션 조절을 위해서라도 ECB가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재정적자로 연명하던 국가들은 예상보다 높은 금리로 빚을 꾸어 공공 지출을 대폭 삭감하라는 요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은 뒤 불황을 맞이한 상태에서 재정 긴축에 돌입한 결과는 혹독했다.



2월 12일, 아테네 도심이 건물 수십 곳에서 방화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상점들이 약탈당하는 극렬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리스 의회는 유로 존이 요구한 더 강력한 긴축안을 통과시켰다. 최저임금 22% 삭감과 연금 축소, 연내 공무원 1만 5천명 감축 등 2012년 한 해 동안에만 GDP의 1.5%에 해당하는 33억 유로의 지출을 줄이는 것을 시작으로 2014년까지 GDP 대비 7%를 줄이는 계획이었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인간군상』, p.523~524)


  구제금융을 신청한 나라들이 긴축을 실시하자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늘어난 세금으로 인해 경제 활력이 더욱 줄어들면서 경기가 더욱 악화했다. 각국 정부의 잘못된 재정 운용으로 인해 이전보다 낮은 생활수준을 감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시민들은 분노와 무기력에 휩싸였다. 15%를 넘나드는 실업률과 후퇴하는 GDP는 당시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몸집에 비해 과도한 채무를 지고 있었던 그리스는 더 강한 강도의 긴축을 실시해야 했는데, 이는 그리스를 또 다른 딜레마적 상황으로 몰고 갔다. 빚을 갚기 위해 긴축을 실시해야 했으나 긴축으로 인해 경제가 위축되면서 빚을 감축할 여력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채무를 탕감받는 대신 더욱 고강도의 긴축을 요구받는 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거듭된 긴축 요구에 그리스 국민들이 EU에 반발심을 품게 된 것은 물론이다.


  여력이 있는 국가들은 부적절한 재정 운용으로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나라에 빌려준 돈을 탕감해 주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구제금융을 받는 입장에서도 고강도 긴축은 국내의 강력한 반발과 경기 후퇴를 일으키는 것이기에 역시 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카드였다. 결국 재정위기를 계기로 유럽연합은 본질적인 상충 문제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한 지붕 안에서 그들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긴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주변국의 경기는 더 나빠졌다. 그 결과 그나마 상대적으로 경기가 좋았던 독일까지 경기가 부진해지면서 유로존 전체가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금융시장의 통합으로 금융 시스템의 상호 연관성이 커지면서 위기가 발생할 때 전이될 위험성이 높다.
(정필모 著 『달러의 역설』, 21세기북스, p.233)


  EU는 공영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기구였다. 하지만 한 지붕 아래에 살림을 차리고 나서야 각국이 서로 조절하기 힘든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고성장의 모터가 작동을 멈춘 경제권에서 누군가의 득은 누군가의 실이 되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게다가 긴축 요구가 남유럽의 경기 후퇴를 불러오면 그들의 퇴보가 다시 EU 내 무역흑자국의 수지 악화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시작되며, 제로섬 게임은 루즈루즈 게임이 되어갔다.


  악순환에 갇힌 실물경제가 부진에서 헤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EU는 미국, 일본과 같은 길을 선택했다. 재정위기의 여파가 본격화한 2012년 이후 ECB는 금리를 1% 이하로 낮추었으며, 신임 총재 마리오 드라기가 무제한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 들면서 금융경제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려 한 것이었다. 실물경제의 성장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나오지 않는 한 이는 눈앞에 닥친 디플레이션을 막는 방편에 불과했다.


  화폐 증발은 눈앞의 디플레라는 불씨를 끄는 효험은 있었지만,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여 부채를 무제한적으로 화폐화한 대가를 치르는 시점은 계속 미래로 미뤄졌다. 경기 부양을 위해 안간힘을 쓰다 결국 쉬운 길, 독이 든 술의 유혹에 굴복한 미국과 일본의 길을 EU가 따라가면서 세계 주요 경제권이 대부분 빚으로 지어진 모래성 안으로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냄으로써 가치를 떨어뜨려 빚 부담을 줄였다. 일본은 외채 비중이 낮아 급박한 상환 압박에 시달릴 일은 없다는 이유로 엔화를 찍어내 금융 제세동기의 힘에만 의지했다. EU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누구보다 꺼리는 독일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유로화를 찍어내는 선택을 했다. 이로써 2010년대를 통과하며 모든 선진 경제권이 빚이라는 폭탄을 안은 채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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