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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n 27. 2022

긴 악몽의 시작,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탐욕의 횡행이 불러온 세계적 금융 위기

  2008년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이 모두 음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경제 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은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연달아 붕괴하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세계화로 인해 강하게 동기화가 진행되었던 유럽과 아시아 등 글로벌 경제 역시 수렁에 빠져들었다. 혹자는 당시의 충격을 두고 20세기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 위기라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그때 마이너스 성장을 피해 간 몇 안 되는 국가였기 때문에 2008 미국발 금융위기라 불리는 사건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서구권에서는 자산 시장이 무너지고 실업률이 급등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한국은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보다 1997년 외환 부족 사태로 인해 훨씬 더 큰 내상을 입었기에 후자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8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아직도 세계 경제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파급력을 행사했다. 그것을 분기점으로 하여 세상은 다른 시대로 진입할 준비를 시작했고, 그 여파가 지금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14년이나 지난 사건이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고 하는 것인가?





미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지속해 왔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2004년까지 총 13여 차례에 걸쳐서 5.5%포인트나 정책금리를 내렸다. 1~2%대의 낮은 금리가 지속되자 대출이 급격히 늘어났고, 그 결과로 주택 가격은 거품을 형성했다.
(소영일·고종문 著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 지구문화사, p.67)


  2000년대 초, 미국 경제에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두 번 밀어닥쳤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발생한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이 폭락장을 경험했고, 9·11 테러의 여파로 시장 심리가 패닉에 빠졌다. 침체된 자산 시장을 부양하고 그를 통한 실물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은 이례적으로 낮은 금리를 적용해 유지했다. 1~2%에 불과한 금리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파격에 가까운 저금리였다.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자 자산 시장은 연준이 바라는 대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산 시장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과열의 조짐을 보였다. 파격적인 저금리 조건에 사람들은 돈을 빌리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이 낮아져 집을 사기 위해 빚을 거리낌 없이 내기 시작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경계를 규정한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로 인해 은행 역시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이윤 창출을 위한 하이리스크 투자를 시도했다.


  빚을 지면서 집을 사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미국의 부동산 물가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더 늦기 전에 집을 사야 한다는 시장 심리로 인해 부동산 시장의 우상향이 지속되었다. 은행이 팽창하는 시장을 두고 볼 리 없었다. 투자은행들이 앞다투어 차입을 제공했고, 대출을 이용한 레버리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상품과 대출에 따른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파생상품 시장이 급속하게 커져 갔다. 자산 시장은 그렇게 영원히 팽창할 것만 같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뉴딜 시대에 탄생한 구태의연한 30년짜리 고정금리 모기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변동금리 모기지였다. … 대부분은 초기 티저금리 기간도 제공했다. 처음 2~3년간 주어지는 이 기간 동안 대출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연기되었고 금리는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다. … 거의 모두가 재융자 대출이었고, 이를 통해 대출자는 주택을 마치 현금 인출기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外 12명 著 『눈먼 자들의 경제』, 한빛비즈, p.133)


  물론 시장 곳곳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출과 레버리지를 통한 이윤 창출에 골몰한 은행들이 기대 이윤의 확장을 위해 대출 문턱을 무리하게 낮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빚을 제대로 갚을 수 있을지 의문인 저소득층(서브프라임)도 갈수록 부실해지는 대출 심사를 뛰어넘어 많은 돈을 빌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별도의 서류 없이 대출을 허용하는 노닥(no-doc)을 내세운 업체에도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환상에 잠식되었다. 어차피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 하에 서민들도 거리낌 없이 큰돈을 차입해 불타는 시장에 뛰어들었다. 은행이 제공한 대출상품에는 초반에 상환금액이 낮은 티저 금리라는 장치가 있었고, 작은 부담으로 돈을 빌렸다는 안도감과 집값이 충분히 올랐을 때 팔면 그만이라는 방심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그렇게 사람들은 대출의 늪에 빠져들어갔다.


  무리하게 대출을 하려는 많은 이들을 보며 은행이 불안감을 느꼈을 법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명문대학 출신 수학 천재들의 계량적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공식을 통해 각종 리스크 회피 수단이 고안되었고, 99%의 확률로 수익을 보장해 주는 마법의 상품 앞에 투자은행은 그만 눈이 멀고 말았다. 더 많은 차입으로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위험한 수단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빈센트가 맨해튼에서 신참 회계사로 일하며 처음 맡은 임무는 살로먼브라더스를 감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맡자마자 빈센트는 투자은행의 장부가 얼마나 불투명한지 알아차렸다. 동료 회계사들 가운데 누구도 트레이더들이 왜 그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마이클 루이스 著 『빅 숏 : 패닉 이후, 시장의 승리자들은 무엇을 보는가』, 비즈니스맵, p.31)


  빚을 이용해 수익을 내는 방법은 빚의 크기가 커질수록 수익률이 커지지만 동시에 리스크도 커진다. 그러나 하이리턴의 유혹에 빠져 하이리스크를 경시하기 시작한 은행들의 폭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집값이 계속 올라 채무자들이 언젠가는 빚을 갚을 것이라는 불투명한 전제 하에 증권가에서는 급이 낮은 채권들을 묶어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윤 추구를 위한 눈속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월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윤 확대 경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월가의 수재들은 채무가 상환되지 않을 확률을 계산해, 채권계의 보험에 해당하는 신용부도스와프(CDS)까지 적극적으로 판매하며 보험료에 해당하는 프리미엄까지 긁어모았다. CDS는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발행자가 거액을 채권자 측에 지불해야 하는 상품이다. 1% 미만의 확률로 일어난다는 채무불이행의 잠재적 리스크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작아 보였던 것이다.


  위험 자산과 위험 자산을 합쳐 신용도가 높은 자산으로 둔갑시키는 연금술에서 양심이라는 개념은 점점 희박해졌다. 신용도가 낮은 이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대출을 해주면서도 채무불이행에 따른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행위는 모래성 위에 또다시 모래성을 쌓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모든 이가 저지른 어리석음의 혼합체는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쓰나미를 불러오고 있었다.



부동산시장이 붕괴됨에 따라 리먼브라더스는 부동산관련 투자로 큰 손해를 보았다. … 몇 달 전만 해도 당당하게 큰소리치던 리먼브라더스가 2008년 2분기 적자를 발표한 것이다. 마이너스 28억 달러였다. … 리먼브라더스는 그들의 알토란 같은 퇴직자금을 밑천으로 40배의 도박을 했고 그들의 돈을 가지고 왕자처럼 살았던 것이다.
(『눈먼 자들의 경제』, p.90)


  드디어 2007년에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거품이 덕지덕지 묻은 부동산 시장이 집값 상승의 한계에 부딪혔고, 그로 인해 집값이 당연히 더 오를 것이라 여겼던 이들의 계산이 틀어지며 담보대출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자산 시장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준이 금리 인상을 시도하며 티저 금리 구간이 끝난 서브프라임 계층의 대출 상환 부담도 크게 불어났다.


  신규 대출자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기존 대출이 빠르게 부실해지자 겁 없이 여신을 감행하던 은행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미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99%의 시나리오에서 이윤을 창출할 판을 설계하느라 나머지 1%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때에 대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동산 하락장에서 자기자본의 몇십 배에 달하는 차입을 감당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융가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빚과 빚의 연결고리에 채무불이행이라는 불꽃이 튄 순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차입이 많은 은행에 대출이 빠르게 부실해지면서 자금이 거덜 나 버렸고, 은행에 투자한 펀드와 기관들이 은행의 채무불이행을 우려해 대출상환을 촉구했다.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른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라더스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형 금융기관들이 휘청이자 소스라치게 놀란 미국 정부가 화마가 더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긴급 소방수로 나섰다.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한 끝에 AIG, 씨티그룹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규모의 유동성 공급으로도 시장에 거대한 충격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산 시장에 대한 신뢰도와 함께 자산 가격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의 재산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우리가 '누가 그 따위 쓰레기 같은 채권을 사나요?' 하고 물어볼 때마다 리프만은 '뒤셀도르프 사람들이요'라고만 대답했어요." 빈센트가 말했다. 뒤셀도르프 사람들이 실제 현물에 기초한 서브프라임모기지채권을 사는지, 아니면 그와 동일한 모기지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왑을 파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상승세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빅 숏』, p.114~115)


  이때 모든 사람들은 경제 위기라는 역사의 반복을 통해 중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며, 과열된 시장과 투기적 심리의 연쇄 작용의 끝은 결국 파멸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2008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시장 과열과 욕망의 증폭이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도 다시금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전까지 세계화는 세계 각지의 경제권을 연결하여 생산 비용 부담을 낮춤으로써 경제 발전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 그러한 연결은 유럽 소비자가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저렴한 의류를 구매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세계인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에서 촉발된 경제 위기로 인해 호주의 소비자가 직장에서 정리 해고당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는 점을 상기했다.


  미국 자산 시장의 궤멸적인 붕괴의 여파는 세계인이 경제적 충격을 같이 부담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충격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는 것이었으며, 세계화의 득실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 부동산 시장의 파국은 40년을 버텨온 경제 이데올로기의 피조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창조주에 균열을 일으킨 역설적인 역사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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