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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02. 2022

독이 든 술, 이지 머니의 등장

경제 침체가 악마의 씨앗을 싹틔우다

  잠시 돈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던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자. 아마도 누구나 어릴 적에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돈이 있어야 사고 싶은 것도 사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나라에서 모두에게 돈을 찍어내서 준다면 다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교육을 받은 지금은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지 알고 있다. 한국은행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정 돈을 찍어서 나눠준다면, 마트에서 파는 껌의 가격마저도 0이 몇 개가 붙어 있는지 세어 봐야 할 지경에 이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희소성은 경제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모든 재화의 가치를 드러내는 잣대가 되는 돈마저도 흔해지면 그 가치가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거슬러서 돈을 살포하는 광경을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똑똑히 지켜보았다. 하다못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경제 만화에서도 돈을 무작정 뿌리면 안 되는 이유를 담아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세계 경제 수장들이 왜 그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인가?  




                       

글로벌 경제를 강타한 신용위기 극복을 위해 세계각국의 '돈비'에 비유되는 구제금융 및 경기부양 지출이 이어지면서, 미국을 포함한 12개 주요 선진국이 내년에 발행할 국채규모는 2조 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 특히 미국은 이번 신용위기 해결에 투입할 자금은 8조 5000억 달러로 작년 GDP 13조 8100억 달러의 절반이 훨씬 넘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는 가운데…(이하 생략)
(소영일·고종문 著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 지구문화사, p.344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는 세계화의 고리를 타고 들불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베어스턴스의 직원들은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었고, 유수의 보험 회사인 AIG마저도 정부의 막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받고서야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미국 재무부는 곧 쓰러질 것 같은 금융회사들을 살리기 위해 한 번에 우리 돈 1000조 원에 달하는 액수를 긴급 지원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덩치가 큰 은행, 투자회사는 숱한 이해관계의 중심에 있으며, 회사의 규모가 클수록 고용 규모도 크기에 도산한다면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고 회사원들이 생업을 잃어 연쇄적인 경제 충격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무엇보다 한 업체의 파산이 다른 업체들의 붕괴로 이어지며 경제 파탄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하자, 정계에서 금융업계에 대한 천문학적인 규모의 지원책을 발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에 어떤 결정이 최선이었는지는 현시점에서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마불사'의 신화를 지키기 위해 시행된 전폭적인 자금 지원은 이후 10년 동안 이어질 중독 현상의 전조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각국 정부는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무제한적 자금 투입에 의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시방편에 가까운 수단이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이 든 술은 점점 널리 사랑받는 아이템이 되었다.



…공적 기관은 결국에 가서는 은행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악성 유가증권'까지 몽땅 사주기 시작했다. 일부 국가는 배드뱅크까지 설립했다. 이를 위한 자금 역시 빚으로 조달되었다. … 이 과정에서 부채는 민간 부문에서 공공 부문으로 옮겨 갔다. 부채는 사회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공공부채는 우려스러울 정도로 높이 치솟았다.
(발터 비트만 著 『국가 부도』, 비전코리아, p.13)


  당장 무너질 것만 같은 금융이라는 둑을 돈으로 막아보려는 시도는 당시에도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대형 은행이 휘청이다 무너지는 것이 여태껏 보지 못한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올 것이라는 견해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은행 업계에 투입된 무차별적인 자금은 흘러들어 간 이후 어떻게 사용되는지 명확히 알 길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원은 결국 정부가 빚을 내서 조달한 것이었다.


  우려는 두 가지 방향으로 현실화했다. 월스트리트에 본사를 둔 대형 금융회사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된 돈 중 상당 금액이, 위험한 파생상품을 고안하고 판매함으로써 금융위기를 촉발한 이들에게 지급되는 특별 보너스가 되었다. 기만적인 행태로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이들을 위해 혈세로 조성된 공공 자금이 사용되었다는 것에 많은 미국인들이 분노에 휩싸였다.


  눈먼 돈이 시장에 보낸 잘못된 사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악성 증권마저 매입한 지나친 관대함은 방만한 경영을 한 업체들이 시장에서 잔류할 수 있게 도와주고 말았다. 긴급 자금, 즉 '돈 비' 급한 불을 끄기는 했으나, 이는 크게 보면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산 붕괴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서 거둔 세금을 쓴 것이었다.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심각한 왜곡이 발생한 셈이었다.



1987~2006년까지 연준 의장을 역임한 앨런 그린스펀 시대에 특히, 시중에서 유통되는 달러화 물량은 기이할 정도로 강한 증가세를 보였다. 그는 '월가의 연인'으로도 통하는데 미국 금융산업이 바라는 유동성을 늘 생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혹에 그의 후임자 버냉키도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재임 중에 돈의 갑문을 2008년부터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짝 열어버렸다.
(위의 책, p.87~88)


  비록 실상은 빚을 다른 빚으로 메운 것에 불과했지만, 어찌 되었든 금융업계의 연쇄적인 파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계와 경제계 수장들은 아직 불만거리가 남아 있었다. 신용경색으로 인한 공멸을 막기 위해 금리를 대폭 인하해 어느새 제로금리 수준에 도달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금융시장은 거대한 충격에서 좀처럼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품으로 가득했던 자산시장은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는 말처럼 좀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막대한 채무를 감당하면서 자산을 매입했던 많은 이들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소비도 쉽게 반등하지 못했다. 미국은 GDP의 약 70% 가까이를 소비가 차지하므로, 경제가 일어서기 위해서 내수 활성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구매력이 위축된 소비자들이 단기간에 활동량을 늘리는 것은 무리였다.


  연방준비은행은 시장이 그 특유의 순환적인 힘으로 살아날 때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연준 의장 벤 버냉키는 금융경제와 실물경제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깊어지는 경제 침체가 디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연준의 발권력으로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해 시중에 유동성을 거침없이 불어넣은 것이다. 그에게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는 동안 경제는 독이 든 술을 제 몸속으로 털어 넣고 있었다.



충격도 크고, 지속기간도 길다면 금리 정책은 여지가 많지 않다. 제로 금리의 시대가 된 것이다. 금리 정책의 경기조절 기능이 약화하면서 양적 완화로 통화정책의 무게가 옮겨가게 된 것이고, 직접 유효수요를 자극하지 못하는 공급주의 통화정책 자체의 내재적 한계는 확장재정을 불러왔다.
(한상완·조병학 著 『트리플 버블』, 인사이트앤뷰, p.122~123)


  미국발 금융위기의 데미지는 세계화의 고리를 통해 널리 퍼져나가며 대다수의 국가가 하나 같이 마이너스 성장의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각국의 대처 역시 판에 박은 듯이 비슷해졌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인위적으로 화폐를 증발하고 대규모 채무를 감당하며 인플레이션 심리를 유발하는 '쉬운 길'을 택했다. 쉬운 길을 통해 쏟아져 나온 '쉬운 돈', 즉 이지 머니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무제한적 금융 완화로 어떻게든 경기를 부양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아베노믹스의 형태로 나타났고,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에 따른 경기 후퇴 여파를 극복하기 위한 결단이 유럽에서는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금리로 나타났다. 그러나 돈이 돌게 하기 위해, 경기 회복을 위해 시행한 갖가지 부양책으로도 세계 경제는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우리가 유동성 함정, 양적 완화라는 단어에 익숙해진 것 역시 이때부터였다.


  빚을 지면 당장은 가용 수단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지만, 상환 만기가 다가올수록 채무자는 시름에 젖어들기 마련이다. 경기 부양을 위해 근시안적 수단을 택한 각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성장동력을 상실한 듯한 실물경제와 금융경제를 인위적으로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현재의 편의를 위해 미래의 고생에 더 큰 이자를 물리는 나쁜 습관으로 연결되었다. 독이 든 술에 중독된 대가를 치르는 시점은 그렇게 미래로 유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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