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아이
<아빠에 대한 기억>
내가 11살 때의 일이다. 퇴근 후 아빠가 아주 까만 새끼 강아지를 안고 오셨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강아지를 만져보았다. 설레이면서도 겁이 났다. 나는 “털이 까만색이고 여자아이니까 깜순이로 하자.”라고 말했다. 내가 잠들고 있을 때 깜순이는 거실에서 검은 비닐봉지로 사부작 소리를 내며 놀곤 했다. 내가 깜순이를 안고 있을 때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큰언니가 나와 깜순이를 찍어준 사진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다.깜순이는 내가 간식을 주면 발로 이불을 박박 긁으며 이불 속에 늘 간식을 숨겨두었다.그 모습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여느 때처럼 나는 이불 속에 머리를 숨기고 있었고,깜순이는 뛰어놀며 나를 찾다가 깜순이의 발톱에 긁혀 내 귀에 상처가 났다.그게 깜순이가 우리 집을 떠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난 귀에서 피가 났고 퇴근 후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바로 다음날 깜순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셨다.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러셨겠지만 난 매우 속상하고 슬펐다. 어린 시절 나는 말로 표현을 잘 하지 못한 내성적인 아이였고,잠들기 전 생각했다. 지금 깜순이는 좋은 곳으로 갔을까.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추운 곳에서 밖에 있지는 않을까. 우리를 지금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3,4개월가량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낸 깜순이. 깜순아 보고 싶다. 지금 하늘나라에서는 잘 놀고 있니.
난 항상 아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색함도 있었고 받아봤자 늘 똑같은 질문 “뭐하냐 밥은 먹었냐 엄마는, 언니는” 난 늘 전화를 받아도 퉁명스러운 목소리인 단답으로 "어 어 응 먹었어 끊을게" 1분도 안되는 통화였다. 그게 내가 제일 아빠에게 후회되는 첫 번째이다. 그때의 아빠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을까. 전화를 받아 아빠의 말동무가 되어드릴걸. 내가 느낀 고독함에는 비교도 안되는, 내가 느낀 외로움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빠의 힘듦을, 감히 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하원 후 친구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였다. 벤치에서 아빠가 앉아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창피했다. 그리고 티 안 나게 구석으로 내 몸을 숨이며 고개를 숙이고 아빠 옆을 지나갔다. 아빠가 나를 못 알아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남루한 옷차림을 입고 있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 우리 아빠라는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이게 내가 제일 아빠에게 후회가 되는 두 번째이다.
막노동을 퇴직하시고 경비 일과 건어물 장사를 잠깐 하셨던 아빠. 그리고 우리 아빠는 작고 왜소한 체구셨다. 그래서 그런지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키가 작고 왜소한 할아버지들의 뒷모습을 보면 아빠가 겹쳐 보이곤 한다. 자주 가는 피부과 병원 건물의 늘 앉아계시는 경비원 아저씨를 보면 우리 아빠도 저렇게 일하셨겠지라며 아빠가 떠오른다.
본집에서 아빠의 공간은 3평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아빠는 매일 하루 종일 소주를 드시며 외로움을 달래셨다. 아빠는 날짜가 지난 달력을 잘라서 뒷면을 이면지처럼 쓰곤 하셨다. 볼펜으로 항상 지인들의 전화번호 등을 적으시거나 이력서를 자필로 적으셨다. 그리고 늘 깔끔하셨다. 지저분하고 털털한 엄마에 비해 아빠는 옷과 책상에 놓여 있는 물건 등이 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을까. 아빠는 나를 안고 오열하시며 말씀하셨다."도대체 언제 클래 제발 얼른 커라" 그 어린 나이였어도 난 느낄 수 있었다. 아빠의 버겁고 무거운 짐을.
퇴근 후 아빠의 손에는 항상 검은 비닐봉지가 달려있었다. 그 안에는 항상 비비빅 아이스크림과 샤브 레와 맛동산 과자가 들어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그때의 나는 왜 이렇게 맛없는 걸 매일 사 오실까라고 생각했다. 구구단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쯤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구 곱하기 구가 뭔지 알아?" 아빠는 대답이 없으셨다. "에이 바보 구구 팔십일이잖아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퇴근 후 신발장에 서계셨던 아빠는 허허허 소리 내며 웃으셨다.
간혹 아빠가 나에게 뽀뽀를 하시며 얼굴을 비비곤 하셨는데 그때는 따갑고 꺼끌꺼끌한 아빠의 수염 촉감이 싫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아빠를 밀쳐내며 "아 싫어 따가워"라고 말했다. 그때 아빠의 수염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거무수름한 아빠의 수염이 그립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고모부의 장례식에서 고모부의 아들 친척 오빠를 만나,내가 몰랐던 아빠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막노동을 해오셨던 우리 아빠에게 친척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부탁하여 아빠와 같이 일을 하게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항상 휴식 시간만 되면 소주 좀 사 오라며 친척 오빠에게 심부름을 시켰고 그렇게 아빠는 매일 소주를 1병 이상씩 마셨다고 한다. "오빠 근데 우리 아빠 술 좋아하고 잘 먹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라고 내가 묻자 친척 오빠는 말했다."아니야 너희 아버지 술 잘 못 드셔. 일이 너무 고되시고 몸이 너무 아프니까 술로 매일 버티신거야" 그랬다. 우리 아빠는 술로 외로움을 버티신 거였다.
내가 성인이 되고 아빠와 단둘이 집에 있었을 때다. 배가 고파 아빠에게 요리를 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김치 계란 볶음밥을 해주셨다. 깨진 계란 껍데기가 들어가 있었고 다소 퍽퍽했던 서툰 볶음밥이 아빠가 해주신 마지막 요리가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본집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고향이 전라도인 아빠 친구분이신 듯했다. "순철이가 요즘 도통 연락이 안 되고 연락이 없어서요." 엄마는 "아, 예..... 돌아가셨어요" 내 기억으로는 친구도 많이 없었던 아빠였는데 걱정이 되어 연락해 주신 아빠 친구분에게 감사드렸다. 그리고 전화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을 아빠의 친구분을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나도 먹먹했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시기도 하지만 소주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내 깊은 무의식 속에 소주를 보면 고단하고 외로우셨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아빠는 나에게 다정하게 애정표현을 해주시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도 않으셨다. 나에게 단 한 번도 손 찌껌이나 훈육을 하신 적도 없으시고 전혀 권위적이시거나 가부장적인 분도 아니셨다. 늘 조용하시고 내성적인 분이셨다. 그냥 늘 묵묵히 새벽에 항상 출근하시는 성실한 분이셨고 출근길 신발장에서 신발 끈을 묶고 늘 같은 푸른색 현장복을 입으신 아빠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자주 소리 내던 아빠의 헛기침이 들린다.
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면 늘 가슴이 아리고
안쓰럽고 얼마나 처절하게 고독하셨을까 싶다.
감히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아빠와 대화를 많이 나눌걸. 올해는 아빠의 기일과 추석에 꼭 납골당을 가야겠다.
<엄마에 대한 기억>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이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는 아이들. 손에는 꽃다발이 대부분 들려있다. 난 엄마도, 꽃다발도 없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한 아이의 엄마가 물었다. "어머 얘 넌 혼자 가는 거니?" 나는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전 집이 가까우니깐요"
9살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몸이 허약하고 왜소했었던 나는 심한 중이염과 이명을 앓고 있었다. 그날은 오른쪽 귀에 계속 누런 진물이 흘러나왔고,결국엔 학교를 결석했다. “영진아 전화기 옆에 두고 갈게” 배게에는 진물이 축축이 젖어있었고,나홀로 누워있었던 거실에는 정적만이 흘렀다.나는 빨리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4학년 때 하원 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서있었다.우산이 없었던 나는 문방구 아주머니에게 검은 비닐봉지를 빌려,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집으로 걸어갔다. 우리 엄마도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꼭 마중 나와 서계셨으면 좋겠다. 저 친구들이 참 부럽다.
6학년, 마지막 어린이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보니 밥상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편지에 대략 이렇게 적어 놓으셨다. 너의 마지막 어린이날인데 엄마가 일 때문에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앞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널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아마 미움받을 용기를 말하고 싶어셨을까.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유 없이 눈물이 맺혔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를 괴롭히던 세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우리 집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혔고 엄마는 그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거실에서 과일을 깎으시며 엄마가 그 친구들에게 말하니 나를 괴롭히던 한 아이가 말했다 “아줌마 지금 칼 들고 말하는 거 저희한테 겁주는 거예요" 나는 그 아이들이 무서워서 안방으로 숨어있었다. 그 아이들이 떠나고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휴,, 요즘 아이들 너무 무섭네요” 저렇게 겁먹고 있는 엄마를 보고도 난 왜 용기 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
내가 초등학생 무렵일 때 남루한 저녁 밥상을 보고 언니들과 아빠는 불평했다. 난 속상해할 엄마를 생각하며 말했다."우와 맛있겠다 오늘 밥이 제일 맛있어" 엄마는 말없이 나의 엉덩이를 토닥이셨다.
어릴 적 나는 목욕탕을 갈 때면 첫째 언니, 둘째 언니, 그리고 나 순서대로 항상 엄마가 머리도 감겨주시고 때도 밀어주셨다. 지친 엄마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생각했다. 3명이나 우리를 씻겨주시는 엄마가 참 힘드시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일 때 운동회를 했다. 율동을 마치고 각자 가정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가족들과 함께 먹거나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운동회를 보러 오셨다. 달리기를 완주하면 손등에 찍어주는 도장을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내 기억으로는 6년 내내 우리 엄마는 내 운동회에 오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친구의 가족들 사이에서 같이 밥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래 그때 우리 엄마는 언니와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 바빠서 못 오셨을 거야.
아마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인가. 엄마에게 겨우 졸라서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때 당시 내 기억으로는 콩쿠르대회 참가 비용이 5만 원이었다. 너무나도대회를 나가고 싶었지만 난 어려운 우리 집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혹여나 엄마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 말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엄마와 단둘이 월마트를 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물건이 갖고 싶다고 엄마에게 눈치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엄마를 항상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주 큰 목소리로 나에게 고함을 지르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난 서러웠고 주눅이 들었다.
아마도 중학교 졸업식이었을 거다. 그날 우리 엄마는 오지 않으셨다. 밀가루를 던지며 즐거워하는 친구들.나는 괜스레 외롭고 주눅이 들었다.
고3 시절, 0교시 수업 시작이 아침 일곱시 삼십분으로 기억한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얼른 등교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티머니 교통카드 충전 만원이 필요했다. 난 엄마에게 만원을 달라고 하기가 늘 어려웠고 주춤했다. 아무래도 엄마도 힘드실텐데 돈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염려로 눈치를 봤던 것 같다.
고등학교 제주도 수학여행이었다. 나는 우리 집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난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고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 학생들만 따로 모아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그것도 꽤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3이 끝날 무렵,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 나 붙었어..”라고 말했다. “어이구 잘했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에게 인정받은 느낌이 들었다.
난 항상 엄마가 어렵고 무서웠으며 나의 감정을 인정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난 꼭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말아야지. 다정하고 지혜로운 엄마가 될 거야. 지금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크다.
가족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이 나에게는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성직자가 되라는 간절한 엄마의 소원대로 난 엄마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 내 나름의 노력을 해나갔다. 그 꿈을 이루게 해주지 못하셔서 그러시는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마음의 응어리를 어떻게 풀까.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는 나를 언제쯤 인정해 주실까. 나를 언제쯤 이뻐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까. 대학 전공으로 유아교육 공부를 하고 그로 인해 엄마에 대한 원망이 더 커졌다.
이렇게나 부모의 역할이 중요한데 우리 엄마는 왜 그러셨을까.
그래 엄마도 사는 게 힘들고 버거워서 그러셨을 거야.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자식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대했잖아.
아니야 그래도 엄마 덕분에 감사한 건 있잖아 올바르게신앙생활한 거.
아니야 근데 엄마는 신앙인의 본보기가 되지 못하셨잖아.
그래도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고 엄마의 결핍이 있으실 거야.
그래도 원망하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아 난 엄마로 인해 사랑받지 못한 결핍이 크게 생겼는걸.
아니야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하셨을 거야.
그렇지만 나에 대한 존중이 없으셨는걸.
너무 어려운 숙제이다. 효도를 중요시하는 유교문화인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은 마음이 무거울 따름이다. 엄마는 종종 말씀하셨다."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래서 너 이름이 남자 이름인 거야. 내가 널 지우려고 했었는데”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란 참 쉽지 않다.
어릴 적 환경은 우리의 무의식에 크게 자리잡는다.과거라는 상처가 클수록 치유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평생 갈 수도 있다.
그럴수록 그 안에서 ‘의미’를 꼭 찾아야 한다.
지나간 과거는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결핍이 무엇인지 바라봐야 한다.
사실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지금도 치유의 과정에 있다.
죄책감과 미움이라는 감정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