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봄, 제주 서귀포의 깡촌 중의 깡촌인 대정읍에 국제영어교육도시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주에, 그것도 영어교육도시라니. 부산의 명지 영어교육도시도 잘 되지 않는데 왠... 그 무렵 제주의 아는 선배가 제주국제영어교육도시의 첫 주택필지 분양이 곧 있을거라는 연락이 왔다. 82필지의 1차 택지 분양이니 서두르라고 말이다. 태어나 단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제주를 말이다. 94학년 X세대로서 졸업여행 마저도 IMF로 차단되었던 그 불운의 시절을 떠올리며 문득 불현 듯 뜬금없는 연락에 팔자에도 없는 제주를 돌이켜봤다. 내게 제주라는 그 멋진 섬에 100평의 땅이 있다면? 집을 짓지 못하더라도 밤하늘 그 땅에 누워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다면? 그거였다. 딱 그거였다. 그거라면 넣어야지. 붙거나 말거나. 한 번은 해봐야지. 그렇게 82개 필지 중에서 중간 지점의 앞과 옆의 도로를 끼고 있는 가장 괜찮은 필지를 골라 가족 모두의 이름으로 몰빵했다. 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넣었던 탓일까? 당당히 내 이름으로 당첨이 되었지만 이거 계약을 해야하나? 불안이 엄습하는 순간이었다.
제주에 100평의 땅이 있다면, 그거 하나
초심으로 돌아가 그래도 내게 제주에 100평의 땅이 있다면이라는 그 베이직한 스스로의 명제를 다시 떠올리며 서울 상암동으로 계약을 하러 떠났다. 서울로 가는 기차에서 내내 긴가민가 했지만 그래도 하자! 였다. 그 하자의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분양가였다. 평당 90만원. 단독주택 필지의 대지가 평당 90만원이라는 건 당시엔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메리트인건 사실이다. 90평 약 8천만원에 이르는 100평 가까운 택지를 분양받은 순간은 뭐랄까, 안되면 뭐 텐트 치고 캠핑이나 하지 뭐.라는 생각처럼 단순한 시작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제주로 떠났다. 보지도 않고 응모해 당첨이 되어 내 땅이 된 그곳에 한 번은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서둘러 떠났다. 그것도 혼자. 황량한 그곳으로.
해보니 되더라, 모이니 짓더라.
허허벌판의 이곳에 대체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만 믿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돌아와 한 달이 지난 무렵 문득 무모하게 집을 짓고 싶었다. 당시 그곳엔 아무도 집을 지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제주의 선배를 통해 같이 집을 지을 분들을 소개받게 되었다. 한 분은 파일럿, 그리고 또 한 분은 부산의 치과원장님. 세 명은 황량한 제주의 터에 집을 짓는다는 단 하나의 같은 꿈을 향해 뭉쳤다. 제주 토박이 건축사에 설계를 맡기고 수많은 장고 끝에 시공에 들어갔다.
직장인의 가성비, 가심비. 시대를 초월하다.
두 분에 비해 넉넉하지 않은 직장인인 나는 좀 더 발품을 팔고 뛰었다. 2주에 한번씩 주말 공사 현장인 제주로 날아가 찜질방에서 숙박하며 현장을 돌아봤다. 과정 하나하나가 신기한 신세계였다. 더 많은 비용을 쓸 수 없어 미국산 창호를 쓰는 두 분과는 다르게 국산 창호를 써야했고 자재 하나하나, 가성비, 가심비를 고려한 치열한 전략이 필요했다. 조명은 부산 반여동에 공간조명에 직접 가서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조명을 구입해 택배로 보냈다. 주방은 특히 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당시 강남에서 유행하던 트렌디한 디자인을 반영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 돌아보니 너무나 올드하지만)
집을 짓기도 전에 구한 구세주 같은 세입자
준공 전 아주 중요한 단계가 하나 필요했다. 역시나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던 터라 제주영어교육도시 카페에 집을 짓고 있으니 전세를 들어올 분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설마 세입자가 사전에 들어올까? 싶었는데 간절함이 통했다. 강남의 한 치과 원장님이 자녀들을 제주영어교육도시에 보내기 위해 집을 찾고 있었고 생각한 컨셉과 맞닿은 집으로 흔쾌히 준공 전 전세금을 송금한다는 조건이었다. 3층 땅콩집을 짓고 있던 터라 한 곳은 전세, 한 곳은 연 1800만원의 연세를 생각했는데 다행히 준공 전 연세까지 셋팅이 가능했다. 그렇게 제주의 GD하우스(갓 태어난 아들 이름의 이니셜을 딴 네이밍)는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제주영어교육도시 GD하우스
잘 팔았다고 생각할 때가 잘 판 게 맞나.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핸드폰에 064라는 지역번호만 떠도 덜컥 철렁 가슴이 반응하는 시기였다. 세입자의 하자 보수, 옵션으로 제공된 냉장고, 김치냉장고, 에어컨, 책상 등 조목조목 연락이 올 때마다 가슴은 조여오고, 목은 말랐다. 심지어 한 세입자는 새벽기도를 위해 촛불을 켰다가 깜빡하고 잠이 들어 집에 불이 날뻔한 아찔한 사고도 이어졌다. (주택 화재보험을 가입하게 된 중요한 시점) 무려 4년간 지속된 덜컥덜컥의 시간들. 그리고 당시 대정읍 영어교육도시의 많은 주택 공급과 세입자 세팅에 어려움을 겪던 나로서는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다. 6개월간 매도 소식이 없던 부동산에서 정말 모처럼 떠난 제주 여행길에 매수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계약을 하게 되었다.
몇 배보다 중요한 참교육, 거름이 되다.
6억 중반에 매도를 했고 내 인생에 제주집은 텅 비게 되었다. 실로 큰 상실감. 그렇게 내게 제주집은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코로나. 해외 국제학교로 갈 수 없는 아이들은 제주영어교육도시로 안착했고 많은 주거시설 중에서도 가장 메인인 1주택단지를 찾게 되었다. 영어교육도시가 있는 곳은 대정읍 구억리. 그곳의 아파트들은 죄다 9억을 넘는다해서 구억리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을만큼 천정부지로 솟았던 곳. 허허벌판의 이곳에 스타벅스가 떡하니 자리 잡을거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은 매도했던 금액의 두 배, 그 이상의 시세지만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는다. 토지 시세만 몇배인지를 모를 지경이지만 어때, 앞으로 더 오를 토지를 찾으면 되지. 그렇게 제주의 오를 토지를 찾은지 몇 년. 아직도 멀었지만 여전히 제주는 매력적이고 욕심나는 곳이다.
@리더영어도시 공인중개사사무소 블로그 이미지 - 매도 후 리모덜링 된 현재 GD하우스 모습
여행으로만 기억되는 제주도, 그 이상의 재주 넘는 가치의 땅으로 만들자.
늦지 않았다. 지금, 당장 제주로 가자. 제주 부동산이 식었다. 끝물이다. 이주자가 떠난다는 떠들썩한 언론, 다 필요 없다. 내게 맞는 땅, 내게 맞는 집,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곳이면 된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된다. 더 망설일 시간조차 사치다. 내가 정하면 그곳이 내 땅이고, 내 집이다. 내가 살아갈 곳, 내가 살고 싶은 곳, 제주의 그곳에 내가 만들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