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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생애 첫 아파트를 겟하다

[30 중반전] 브역대신평초 첫 아파트 갖기

by 파란카피



수많은 야근과 철야, 주말 출근으로 얼룩졌던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시절,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이야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었고, 보람을 찾았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다. 기업 홍보실로 이직하기 전 좀처럼 아파트 분양광고는 하지 않던 광고 회사가 경쟁 PT로 한꺼번에 4개의 분양광고를 진행하게 되었다.(지금은 모두 분양가의 3배가 된 아파트들이다.) 카피라이터로 퇴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더 잦아졌고 삶은 피폐해져 갔다.

그 무렵 누구나 하는 결혼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40대엔 해외에서 혼자 살아야지 하는 막연하고도 터무니없는 생각에 집을 왜 사? 집 따위를 왜 사? 하는 마음으로 꼬박꼬박 따박따박 적금을 들었고 만기 시점이 오면 정기예금에 넣어 돌아오는 이자에 기뻐했다. 매년 해외여행 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내리는 모범상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그땐 그게 가장 확실한 재테크였고 보상이었다. 부동산은 그들만의 리그, 무모한 자들의 한탕이라고 치부했다. 집을 살 기회가 참 많았지만, 그때 샀으면 지금 어땠을까 싶지만, 돌아보니 하나도 사지 않았던 게 가장 어리석은 판단이었음을 지금에서야 추억 삼아 돌아본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전세도 행복한 신혼


그러던 내가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석 달 만에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까지 초고속 유부 대열에 합류했다. 여전히 집은 소모품인데 집을 왜 사? 하는 마음으로 아파트 전세를 신혼집으로 시작했고 변함없이 행복한 무주택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들과의 추억 가득한 그 집에서 2년의 시간을 꽉 채우고 나오는 날, 2억의 전세금을 돌려받으며 그래, 전세 살길 참 잘했다며 내게 표창장을 셀프 시상했다.


산후조리원에서 신혼집으로 온 첫날 잠이 든 아들과 나


조금은 불편하지만 시드머니를 위한 처가살이


2년을 채우고 본격 시작된 처가살이. 당시 처남은 직장을 다니면서 열심히 부동산 재테크를 하는 부동산 빠꿈이였고 나는 그런 처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꼰대였다. 직장 생활을 하기에도 바쁜 시간에 무슨 부동산을 보러 다녀? (조금 재수 없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알바를 해보지 않았다. 대학 땐 그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 게 알바보다 낫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있었고 광고회사 시절엔 회사의 카피라이팅에 집중하고자 외부 카피 알바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MZ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시절만의 독특한 분위기란 게 있었다.

처남은 아파트에 이어 장인 장모님이 거주하면서 관리가 필요한 통 원룸 건물을 지속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부산 동래구 온천동과 금정구 장전동의 경계에 있는 통 원룸을 대출을 끼고 사게 되었고 맨 위층 주인 세대에 신혼 전세를 엔딩 하고 세 식구가 합가 하게 되었다. 회식으로 늦은 밤에 귀가하거나 주말이면 나만의 시간이 없는 조금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 사이 차곡차곡 모은 돈은 시드머니로 그대로 쌓였다.



덜컥, 브역대신평초 아파트를 사다.


부동산 재테크에 일찍 눈을 뜬 처남이 어느 날 아파트 하나를 덜컥 추천했다. 부산 동래구 명륜동에 있는 신축 아파트로 국평 기준 1억 원에 가깝던 프리미엄이 단기 하락으로 2천만원으로 내려앉은 상황이었다. 서둘러 계약금을 보냈고 계약 당일 만나게 된 매도인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원정 온 꾼이었다. 원하는 수익을 내지 못해 정리하고 떠나는 입장이라 어찌나 투덜대며 날인을 하는지 그날의 상황, 그분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엔) 1군 브랜드에, 명륜역 지하철과 가깝고, 대단지 신축에 평지, 그리고 동래구 학군의 이름 난 초등학교가 단지 내에 있는 그야말로 브역대신평초 탑층으로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중도금 무이자로 부담이 없었고 내 생에 첫 아파트로 다 지어지기까지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입주 시기에 전세 세입자를 구했고, 너무나 좋은 나보다 젊은 부부였다. 신축 아파트 입수 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하자보수. 입주를 하게 된다면 몰라도 적극적인 세입자를 만나지 못하면 자잔한 하자는 묻히기 마련이다. 우리 세입자는 마치 자기 집처럼 하자 리스트를 만들어 이메일을 보내주며 클린 체크를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세입자는 세상에 없을 지경. 그 세입자는 만기 이후 이 아파트가 너무 좋아 2차를 프리미엄을 주고 샀고, 향후 엄청난 시세차익을 실현했다.) 특히 결로 하자가 있는 부분은 블로그, 유튜브를 열심히 참고해 개선하고 지속적으로 관리사무소에 클레임을 걸어 나와 함께 좋은 컨디션으로 바꿀 수 있었다.



비과세 수익실현, 두 번째 테이프를 끊다


비과세 2년 실 거주 요건을 위해 드디어 처가살이를 접고 내 생애 첫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모든 것이 편리했다. 유치원과 가까운 아이의 만족도 또한 높았다. 지하철과 가장 가까운 동으로 출근 시간도 단축되었고, 생활 인프라 또한 편리함으로 가득했다. 이 무렵이었다. 제주의 집을 정리하고, 남겨둔 아파트 하나. 2년의 거주가 끝나고 드디어 수익실현을 통해 아파트도 정리하게 되었다. 또 이사를 가니? 그냥 살지. 하는 주위의 많은 우려에 귀 막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또다시 전세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는 괜찮아. 힘든 이사지만 이사 비용을 낮추기 위해 주말보다 평일을 택한 우리는 출근으로 아내 혼자 장인 장모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제주에 이은 두 번째 수익실현이 마무리되었다. 당시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누군가 그랬다. 머리에서 판 게 아니라 어깨에서 팔았네요. 더 오르겠지만 수익으로 다른 곳에 투자하신다는 마음으로... 지금 그 아파트는 팔았던 금액보다 두 배, 그 이상이다. 제주의 집도, 이 아파트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수익을 안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몇 번의 투자를 통해 더 큰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좀 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위무한다. 부동산 한 네임드의 명언이 모든 것을 정리해준다. ‘부동산은 파는 게 아니라 사서 모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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