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한때 나는 내비게이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 300미터 앞에서 우회전..."
잠시 후라는 말이 좀 모호하지 않은가?
300미터, 200, 100미터... 줄어드는 사이 우회전 길이 연거푸 나타난다.
어째야 되나, 망설인다.
조마조마 0이 되면 우회전해야 할 길은 이미 지나온 길이 되고 만다.
바보 같은 소리겠지만 아무튼 나는 여러 번 그랬다.
내비 없을 때도 잘만 다녔는데. 그래서 내비를 잘 켜지 않는다.
출퇴근할 때만 운전을 하니까 사실 내비가 크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교회를 갈 때는 언제나 남편이 운전한다.
한 번은 남편이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해서 내가 운전을 하게 됐다.
내비를 켜고 정신 바짝 차리고 출발했다.
그 교회를 몇 년이나 다니고 있는데 나는 정말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까딱 했으면 대전으로 갈 뻔했다. 할 수 없이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내비 핑계를 댔다.
"무슨 내비가 도대체 설명을 못해. 이상하게 안내해서 이렇게 됐잖아."
남편이 내비를 켜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잘하는구먼, 대체 뭘 잘못 설명한다는 말이고."
안 그래도 속상하고 창피한데 뭐라 하니까 화가 나서 소리쳤다.
"지금 내비 앞에서 마누라를 꾸중하나?"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작년, 퇴직을 앞두고 친구들이 축하턱을 쏘겠다고 해서 근무지 근처에서 만났다.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떨다 나오니 9시가 좀 넘었다.
자신 있게 나섰는데 밤이라 그런지 동네가 낯설었다.
출퇴근만 하지, 그 지역을 돌아다닌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익숙한 곳이니까 출발해 보자고. 내비를 켜고 목적지를 자택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내비가 또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로터리에서 1번 출구로...."
이건 또 뭔가.
로터리는 둥근 교차로인데 1번 출구는 뭐지? 그냥 알아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투덜대면서 알아서 갔다. 다행히 밤이고 조금 시골이라 차량이 없었다.
다시 낯익은 길이 나왔다.
그런데 이면도로로 들어가는 순간 마주 오던 차가 '빵빵' 거리면서 운전자가 창밖으로
멈추라고 손짓을 했다. 멈췄다. 내 차 옆으로 오면서 그가 말했다.
"가시면 안 돼요. 일방통행이에요."
내가 한숨을 쉬자 남자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대구요."
"아, 나도 대구 가니까 따라오세요."
그 남자가 친절하게 앞장섰다. 구세주를 만난 듯 좋아라고 따라갔다.
내비가 아주 난리였다. 쉴 새 없이 좌회전을 하라고 했다.
남자를 놓치면 안 되는는데...
나는 탐색 중이라는 말과 좌회전만 시끄럽게 늘어놓는 내비가 정신 사나워서 확 꺼버렸다.
캄캄한 도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남자의 차도 보이지 않았다. 마주 오는 차도,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갑자기 내가 정말 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무섭고 외로웠다.
내가 내비와 다를 게 뭔가. 대구라니, 잠시 후라는 말과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제대로 대구 북구라고 했어야지, 그 남자가 가는 방향은 수성구일 수도, 서구일 수도 있는 건데.
정신 차리자!
그때 지구는 둥글다는 아주 중요한 자각이 들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난다고 노래하지 않던가.
지구도 그런데, 하물며 대구고 경북이면 얼마나 다행이냐.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귀가가 늦어지니까 걱정이 된 거다. 어쩌고 저쩌고 하니까 묻는다.
"주변에 간판이나 도로표지판 같은 거 없나?"
"다사라는데."
"그럼 좌회전해서."
"아, 몰라. 내비도 당신도 왜 자꾸 좌회전만 하래? 난 그냥 계속 직진할 거야. 그래도 우리 집 나오지?"
남편의 꾹 눌러 참는 한숨 소리가 느껴졌다.
"어, 둘러오긴 하겠지만 직진하면 동아쇼핑이 나올 거야. 거기서부터는 길 알지?"
40분도 안 걸리는 우리 집에 드디어 2시간 만에 도착했다. 남편이 말했다.
"어디 가서 운전 경력 오래됐다는 말, 절대 하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뜨신 물에 샤워를 하면서 나는 참 행복했다.
둥근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이. 내가 사는 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