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반]프로젝트3
By 이작
해마다 봄이 되면 모든 미디어들은 ‘춘투' 중계를 준비했다. 올해의 최고 연봉은 누구인가. 예전에는 ‘춘투'라하면 ‘임금 협상철'을 낮잡아부르던 용어였지만, 지금은 말그대로 기록 갱신의 시즌으로 모든 미디어가 마치 프로야구 시즌을 기다리듯, 2월말에서 3월까지의 ‘직장인 이직철'을 준비하며 연일 누가 최고 연봉 기록을 갱신하는지 앞다투어 보도했다.
프로 스포츠에나 있었던 FA제도가 일반 기업체에 도입된 지 18년. 그 해 최고 연봉으로 계약한 직장인은 야구선수 만큼이나 화제가 되었고, 아이돌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법적으로 규정된 용어는 따로 있었지만 보통 ‘샐러리 FA’라 불리었고, 요즘은 그냥 ‘FA’라고 해도 ‘월급쟁이들의 이직철'이라고 이해할 지경이었다.
이번 해는 특히 뉴스가 넘쳐났다. 올 봄의 스타는 곽건기였다. 이름에 G가 3개 들어간다며, 3G라는 애칭도 생겼다. 이른바 정치인들이나 얻는다는 영어 약자 애칭이었다. 이름보다 3G로 더 많이 불렸다. 지난 해에는 좀 주춤했지만, 그 전년도에 이어 두 번이나 탑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각 업종을 통틀어 수 백만 직장인들 사이에서 최고 연봉을 기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한 사람이 두 번이나 탑을 거머쥔 것은 FA가 도입된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곽건기가 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가 미혼이라는 점도 컸다. 서른 일곱이라는, 좀 늦다면 늦은 나이이긴 했지만 뉴스 인터뷰에서 ‘올해는 가야죠'라고 수줍게 말한 멘트가 수많은 예비 장모들의 눈에 불을 당겼다. 170을 겨우 넘는 키도, 살짝 넓어지기 시작한 이마도, 귀엽다는 평을 들었다.
물론 170이 안되어도, 이마가 정수리까지 후퇴했어도 인기에는 영향이 없었을텐데, 그것은 당연히 올해 그가 기록한 연봉이었다. 그의 연봉만큼이나 화제가 된 것은 그를 영입한 새 회사 H가 전 직장 B사에 낸 이적료였다. 자기 연봉의 n배의 매출을 올려야 기업 생산성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곽건기는 근무하던 B사에 자기 연봉의 100배의 매출을 안겨주었기에, 계약도 끝나지 않은 그를 쉽게 놔줄리 없었다. 몇 주 동안의 물밑협상 끝에 H사는 FA도입 후 최대 이적료를 지급한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슈는 따로 있었다. 그 이슈의 주인공 역시 곽건기였는데, 그 해 6월 돌연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간 그에게 독립해서 회사를 세우는 게 낫지 않냐며 투자하겠다는 자본가들도 여럿 있었으나 곽건기는 그때마다 ‘나이가 더 들어도 현업에서 뛰고 싶다’며, ‘언론사에는 대기자(大記者)라는 것이 있지 않나. 나도 대사원(大社員)으로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것이다'라고 밝혀 왔었기 때문에 뜬금없는 독립선언이 놀라웠다.
거액의 이적료와 연봉을 지급했던 H사는 날벼락을 맞았다. 계약 위반이라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3G 먹튀?'라는 식의 뉴스들이 포털을 가득 채웠고, 댓글들은 ‘먹튀'와 ‘기대'로 서로 싸웠다. 대체 수십억대 연봉 직장인이 새로 도전하려는 업종이 무엇인가? 모든 미디어가 곽건기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곽건기가 기자회견을 열자 여론은 순식간에 곽건기 편으로 돌아섰다. 그의 신사업은 ‘구디 길드' 설립이었다.
직장인의 FA가 대개 동종 업계에서 이뤄지기 마련이고 동종업계는 또 대개 비슷한 지역에 모여있다보니 사람들은 지역명을 따서 ‘OO리그'라고 불렀다. 가장 규모가 큰 리그는 ‘광화문 리그'였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오래되다보니 서울 전역에 영향력이 있었다. 광화문 리그와 여의도 리그는 용산을 두고 서로 자기 리그에 속한다고 다투었다. 지역을 두고 다투는 것은 이권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권은 헤드헌팅 회사들의 매출 때문이었다.
샐러리FA가 정착되면서 직장인들의 이적 조율을 맡는 인재채용, 헤드헌팅 회사들이 크게 성장했고, 수많은 회사들이 생기고 사라지고 합병되면서 각 리그에 위치한 헤드헌팅 회사들은 서로 모여 봄을 준비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광화문 리그는 광화문 길드가, 여의도 리그는 여의도 길드가 담당하는 룰이 생겨났다.
가장 매출이 높은 길드는 강남 길드였다. 강남 리그와 분당 리그에서 이뤄지는 FA는 모두 강남 길드에서 맡았는데,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중심으로 한 '구디' 리그가 새로 부각되면서 비슷한 업종의 기업이 구디로 많이 이전하다보니 자연스레 강남 길드의 활약이 컸지만 지역적으로 가까운 여의도 길드도 집중 관리하는, 이른바 임자없는 전쟁터였다. 곽건기는 이런 곳에 새로 구디 길드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 월급쟁이들의 권리는 무시받아 왔습니다. 계약서에서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고 갑과 을의 관계도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월급쟁이들은 왜 아직도 고용계약이나 용역계약을 써야 합니까? 우리의 권리가 왜 ‘고용주'에게 고용되어 ‘피고용'된 입장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인격과 능력은 자본에게 고용되어 용역으로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 만들어질 구디 길드는 이러한 구조를 바꾸려고 합니다. 기업은 우리를 소유하고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과 시간은 온전히 우리의 것입니다. 기업은 우리의 능력과 시간을 잠깐 빌려쓰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시간을 기업에게 빌려주고, 기업은 우리에게 그 대가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려져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과 몸과 시간의 온전한 주인입니다. 구디 길드는 우리 자신의 시간을 보호하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선언과도 같은 곽건기의 기자회견은 수많은 직장인들의 환호를 받았다. 성급한 국회의원들은 ‘시간X능력 임대차 계약 법률안'을 상정했고, 발빠른 미디어들은 고용노동부 폐지에 대한 기획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4개월 뒤, 곽건기는 ‘구디 렌탈'이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노동자들은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기업들에게 빌려주고, 기업들은 노동자의 시간을 빌려 쓴 값을 내는 것이었다. 구디 렌탈은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서 수수료를 챙겼다. 2년 렌탈 계약기간이 끝나갈 쯤이 되면, 길드는 비용은 조금 높아지지만, 더 젊고 능력있는 인재로 바꿔주겠다고 기업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다. FA가 활발하던 봄에 더이상 이직과 연봉탑은 없었다. 다만, 2년 약정이 끝나는 시기마다 길드끼리의 경쟁은 더욱 심해져서 여전히 ‘춘투'라는 단어만 살아 남았다. 모든 길드들은 곽건기의 사업모델을 따라했다. 3년 뒤 전체 급여생활자의 65%는 각 기업이 아닌 길드 소속이 되었고,
그렇게 이 이야기가 끝나는 줄 알았지만, 새로운 이슈 역시 곽건기였는데, 그가 새로 꺼낸 사업 아이템은 ‘구독서비스'였다. 매월 새 인력으로 교체해주는 상품으로 업종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지만, 구독서비스 론칭 첫 해 ‘구디 렌탈'은 사상 최고 흑자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