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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장 반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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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 Sep 11. 2024

원죄

[한 장 반]프로젝트2

by 한작


정우는 웅웅거리는 불쾌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거슬리는 소리를 찾아 눈을 뜨려 했지만 접착제로 붙인 것 마냥 눈꺼풀이 열리지 않았다. 눈꺼풀뿐만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비가 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가운데 귀만 열려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곰곰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흐릿한 기억조차 하나 없이 완전한 어둠뿐이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조차 없으니 정우가 할 수 있는 건 짜증스러운 소리를 견디는 것 뿐이었다. 


번데기처럼 꼼짝하지 못한 채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연옥처럼 지루하고 끔찍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정우는 웅웅거리는 소리의 정체가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남자가 하는 말을 분간하고 뜻을 이해하는데 다시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때쯤 겨우 눈을 뜰 수 있게 됐지만 모든 게 해상도 낮은 사진처럼 뿌옇고 어른거릴 뿐이었다. 손과 발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입술을 떼는 정도는 가능했다. 온 힘을 다해 정우는 입을 오물거리며 그동안 간절하게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를 겨우 꺼냈다.


“몸이, 몸이 너무 아파요.”

“오! 이제 정신이 드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선생님 모시고 올 게요.”


정우가 말을 하자 누군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놀람 속에 묘하게 흥분이 섞인 말투였다.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정우가 기다리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 여기는 어디인지? 자기는 왜 여기에 있는지? 몸은 괜찮은 것인지? 남자가 말했던 선생님을 기다리며 정우는 쌓인 궁금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정우씨. 나이는 24세. 등산 중 절벽에서 추락. 장기 대부분이 손상되었고, 분쇄골절로 사실상 사망 상태나 다름없었지만 비교적 손상이 적었던 뇌만 안드로이드에 이식한 상황입니다. 지금 상황. 이해하실 수 있으신가요?”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흐릿한 형체만으로도 꽤 나이가 많다는 인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 온 남자는 종이 뭉치를 넘기며 저녁 찬거리 재료를 말하는 것보다 더 건조하게 정우가 궁금해하던 것들을 설명해 줬다.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정우가 온힘을 다 해 고개를 들어 항의하려 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최소 에너지만 공급받는 상황이라 움직이는 건 무리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공해 드릴 수 있지만 비용이 청구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희 사무장과 이야기 나누시면 됩니다.”


해야 할 말을 다 했는지 남자는 그대로 나가버렸고, 뒤를 이어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설명을 시작했다. 모두가 정우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사고를 크게 당하셨어요. 병원에 도착하셨을 때 전 무슨 마네킹에 이쑤시개를 꼽아 놓은 줄 알았어요. 그게 잘 보니까 뼈가 부러지면서 피부를 뚫고 나온 거더라고요. 하하! 온 몸이 달걀 껍데기처럼 깨쳐서 살릴 부위가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아무튼, 문제가 이게 몸이 이런데 뇌가 살아 있는 상태였단 말입니다. 법이 그러니 일단 수술은 했는데, 이식비용을 빼고라도 지금 몸만 한 10억 정도 할 겁니다. 자세한 비용은 나중에 정산을 해 봐야 알겠지만 수술비랑 이것저것 해서 한 15에서 17억 정도는 생각 하셔야 돼요.”


사무장의 말에 정우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우가 기억을 찾거나 말거나 사무장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선택을 하셔야 하는데요, 정우씨가 에너지 주입을 거부하시면 거기서 끝입니다. 저희는 사망 판정을 내리고 기계는 회수되겠지요. 아니면 에너지 주입을 하신 뒤 비용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아! 일자리는 걱정마세요. 저희 병원은 다양한 산업체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어서 취업 자리도 알아봐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비용도 청구가 되겠지만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닙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놓고는 죽을지 살지를 결정하라고 하고 있었다.


“에너지 공급을 원하시면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박여 주세요. 반대로 원치 않으시다면 눈을 계속 감고 계시면 됩니다. 바로 결정하기 힘드시겠지만…”


사무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는 눈을 두 번 깜박여 보였다. 아직 이렇게 젊은데 죽으라는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15억이 넘는 빚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무장의 안내에 따라 사인을 하고나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자 낯선 금속이 움직였다. 이미 들었지만 확실히 눈으로 직접 보자 자신의 처지가 이해됐다. 정우는 낮게 울음을 터트렸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정우가 소개 받은 일은 화학공장의 폐기물 처리였다. 유독물질이 나온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보수가 높았다. 게다가 안드로이드인 정우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버는 돈은 거의 대부분 빚을 갚는데 써야 했지만 불편하지도 않았다. 먹을 필요도 없었고 한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에너지만 공급받으면 그만이었다. 가끔 30년 넘게 갚아야 하는 빚이 있다는 현실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빚만 모두 갚고 나면 금속에서 유기체로 몸을 바꾸고 평범한 노후를 보내겠다는 꿈을 꾸며 참고 견뎠다.


그렇게 일 년. 에너지를 공급받고 언제나처럼 의사에게 심리 상담을 받았다. 사고로 몸을 안드로이드로 바꾼 사람들에게 정부가 지원하는 복지 가운데 하나였다. 상담 내용은 별게 없었다.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는지, 현재 상황에 불만은 없는지, 차별을 당하거나 무시당할 경우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에 대해 몇 마디 나누는 정도였다.



정우가 상담실을 나간 뒤 의사는 몇 가지 항목에 체크를 한 뒤 회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회의장엔 AI-데이빗 Ver.07 중간 발표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정우와 상담을 끝낸 의사는 감격한 표정으로 현수막을 본 뒤 연단에 올랐다.


“지시하면 따른다! 그런 단순 AI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반대로 복합 사고를 하는 양전자AI는 너무나 인간 같기에 보상 없는 단순 반복 작업으로 인한 극심한 우울감과 무기력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AI에게 적정 보수를 지급한다면 굳이 AI를 쓸 필요가 없겠지요.”


의사는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뒤 희열에 찬 표정으로 연설을 이어갔다.


“저희 연구팀은 AI가 너무나 인간 같다면 인간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역사에서 찾아냈습니다. 이유 있는 노동, 이유 있는 갈취!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은 것이라고 세뇌당하던 시기를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는 AI에게 같은 실험을 진행했고, 일 년 동안 관찰했습니다. 놀랍게도 거액의 빚을 갚아야 하는 양전자AI는 우울증의 증후가 없었고 도리어 희망을 만들어 냈습니다! 30년! 현재 AI의 법정 수명인 30년 동안 안정적으로 노동할 수 있는 AI! 인류는 다시 커다란 한발을 뗀 것이라고 저는 자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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