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산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까? 엄마라는 호칭이 낯설었던, 아이가 갓 돌을 넘겼을 무렵인 거 같다. 큰애를 학교에 보내고 지쳐서 소파에 앉아 넋을 놓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린이교육 전문가가 자기는 이스라엘에서 유학하는 동안 아이를 키웠다고 했다. 그이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국가가 아이를 돌봐 주는 체계가 잘 돼 있어서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쉽게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그이는 우리나라는 온전히, 여전히 양육이 엄마 몫이라 모든 게 엄마 탓이라는 환경을 얘기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는 말을 건넸다. 그 말에 무너졌다. 울음이 쏟아졌다.
요즘은 늦게 결혼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지만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는 많았다. 늦은 나이에 인연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내 나이가 많다고 가는 곳마다 아이가 장애가 심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양수검사를 받았고 노산이라 위험하다고 두 곳의 산부인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중절하라고 했다. 염색체 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을 찾기 전까지 불안했다. 그곳의 의사는 산부인과에서 양수검사만으로 장애가 심할 거라고 판단해서 심지어 중절까지 하고 검사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 양수검사는 오류가 엄청 많다고 했다. 장애가 심하면 유산이 된단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산부인과가 많았다. 부랴 사랴 노산전문 산부인과로 옮겼다.
아이가 신기했다. 모성애가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아이가 이뻐서 어쩔 줄 모르는 부모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니 엄마가 얼마나 냉정한 사람이었는지 내 안에 있는 엄마를 통해 저절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아들은 이쁘게 생겼었다. 병원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다들 딸이냐고 물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친정에도 시댁에도 산후조리를 기대할 수 없어서 산후조리원을 한 달을 끊었다. 다들 2주 정도 하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가 천국이었다.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나는 무너졌다. 어떻게 재워야 하는지 어떤 울음이 배가 고픈 걸 말하는 건지 아니면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육아책을 뒤적거렸다. 아이를 재우는 일도 쉽지 않았고 잠깐이라도 아이가 잠이 들면 집안일을 했다.
입이 짧은 아이는 두 시간마다 20ml의 우유를 먹었다. 잠을 못 잤고 힘도 달렸고 내 체력도 바닥이었다. 산후조리원에서 간신히 회복한 몸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하루를 동동거린 끝에 애를 재우고 컴퓨터를 켜고 잠시라도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을 손 놓은 지 육 개월도 안 됐는데 마음이 허했다. 아들을 키우느라 몸은 지쳐가는데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내 사회적 욕구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마음에 우울했다. 아이를 키우는데 온 힘을 들여도 모자랄 판인데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늦은 밤 혼자 텔레비전을 켜고 앉았다. 최화정 씨와 친구들이 나와서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는 거였다. 노처녀로 사는 그네들이 일하는 얘기를 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일이 그리웠다. 왜 난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욕만 했는지 왜 그 일을 즐기지 못하고 짜증만 부렸는지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일을 끝낸 그 쾌감을 시원하게 즐기지 못했다. 그게 속상했다. 일을 할 때는 일이 좋은 줄 몰랐고 아이를 키울 땐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줄 몰랐다.
시간이 흘렀다. 아이를 제대로 못 키울까 두렵던 마음은 사라졌고 아이를 조심스럽게 대하던 마음은 없어졌다. 당장 앞이 급했다. 먹여야 했고 입혀야 했고 애를 가르치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이에 대한 걱정은 당장 생활비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었다. 그 시간도 지났다. 내가 못해준 시간만큼 아이는 마음이 상했고 그 아이는 사춘기를 힘겹게 통과했다. 엄마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고 아들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들의 방황을 붙들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만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은 자기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던 형을 만났다. 풍비박산된 가정과 급작스런 어머니의 자살, 고2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렸던 형을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들은 내게 말했다. 그때부터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불같은 반항이 점점 사그라들었던 것도. 차라리 이혼을 하지 왜 이렇게 살았냐며 불만을 터뜨리던 아이는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아이는 더 달라졌다.
다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든 시절도, 겪지 못할 거 같은 고통도 지나갔다. 잠 못 이루며 불안에 떨던 시간도 지나갔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한 뼘 더 자랐고 아들도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숙했던 내가 조금은 성숙해졌으리라. 고통을 이겨냈던 건 결국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