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by 송나영

어린 시절 만화방에서 남자애들 틈에 쭈그리고 앉아 만화를 보던 내 모습이 충격이었다고 했다. 동생은 만화방이 칙칙하고 어두웠다고 했다. 그 분위기가 무척 낯설었었나 보다.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만화방 분위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만화책은 기억에 없고 '아톰'과 벰, 베라, 베로가 나오던 만화와 캔디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6시 느낌이 생생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만화를 좋아하지만 유독 공포물이나 SF물은 잘 보지 않는다. 겁도 없이 일을 쉽게 저지르는데 공포물만은 겁이 난다. 보는 내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여름 저녁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던 '전설의 고향'은 아주 질색이었다. '진격의 거인'이 그랬다. 볼 마음조차 없었다. 거인이라는 소재도 마음에 안 들지만 잔인하다는 말에 마음을 접었다.

일본 드라마 중에 '중쇄를 찍자'가 있다. 만화책 출판사에 입사한 주인공이 만화가 지망생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그림 실력이 초보자 수준이었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능이 대단했던 만화가 지망생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늘 겁먹은 눈에 사람들과의 소통이 힘들었던 그는 주인공의 도움으로 만화계의 거장의 집에서 도제 생활을 하게 됐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듯한 지망생은 작가의 부인이 베푸는 친절에 괴성을 지르며 발작을 한다. 그가 어려서 엄마로부터 심한 학대를 당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어린 아들의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 나갔고 집에 갇혀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트라우마였던 공포를 주제로 만화를 그려서 대성공을 거둔다.

드라마에 나온 만화작가들이 실제 인물을 소재로 했다며 공포 트라우마가 심했던 작가가 바로 '진격의 거인' 작가라는 것을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서 읽었다. 그 이후에 다른 블로그에서는 아니라는 얘기도 있고 정확한 정보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공포라는 소재를 기가 막히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깔린 극도의 공포감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처럼 실체화시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러다 유현준 교수가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진격의 거인'을 보고 만화에 나오는 공간을 건축 전문가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나 등장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도 호기심을 키웠다. 거장의 냄새가 난다는 말도 입맛을 다시게 한 이유였다.

잔인한 장면에 나는 자주 멈칫거렸다. 재미있으면 밤을 새우며 보는데 '진격의 거인'은 내가 몰입하기에 진입장벽이 높았다. 내 마음이 긴장을 감당할 수 없으면 며칠을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다시 보곤 했다. 불안에 불안을 키우고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전투로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는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오래 두고 본 만화는 처음이다. 인간의 두려움을 너무 실감 나게 그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불안을 끝까지 몰고 간다. 타협하지 않는다. 간신히 마지막까지 다다랐을 때 인간의 이기심과 적대감을 너무 현실적으로 그려서 또 쉬고 말았다. 최종화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주일 이상을 생각에 빠졌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람들, 자유를 갈망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전 세계를 다 파괴하려는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참 자유란 압제가 파괴되고, 한 인민이 다른 인민을 억압하지 않으며, 실업과 빈곤이 없고, 사람이 내일 일자리, 집, 빵을 잃을까 불안해하지 않는 곳에만 존재한다.'라고 했다. 참 자유를 얻기 위해 파괴해야 하는 것이고 실업과 빈곤이 없으려면 모두 같아야 한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논리인가. 마오쩌뚱이 아버지가 시킨 일이 하기 싫어 고집스럽게 반항함으로써 '자유'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마오쩌뚱은 자유를 지향해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을까? 히틀러가 유소년과 청소년을 체계적으로 조직해서 히틀러 유겐트를 키웠고, 마오쩌뚱이 홍위병을 키웠다. 어려서부터 세뇌당해서 같은 민족인데도 오로지 죽여야 하는 적으로 판단하는 무지성이 삶을 이끌어간다. 비판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며 사랑하지 않는다. 관용은 없다. 내 가족, 내 나라, 내가 사는 공동체가 무너질까 봐 적과 싸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모조리 적인 것이다. 스파이로 다른 입장에 섰을 때 평생 나를 지탱한 가치관은 무너지기도 한다. 벽에 갇혀 살 듯 생각에 갇힌 사람들에게 다르다는 것은 없애야 할 악의 근원인 것이다.

망할까 두렵고 망칠까 두렵다.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감에 기가 죽고 공격적으로 변하게 된다. 막상 겪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허상에 속을 때가 종종 있다. 남과 다른 것도 불안하고 남들처럼 해야만 잘하는 것 같다. 똑같은 유전자가 아닌데도 남들과 비교를 한다. 내가 갖고 태어난 프로그램이 다른데 남들에게 기준을 맞춰 산다. 자기 생각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서 이미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삶이다. 다름은 공포를 만든다. 어려서 외국인을 쉽게 볼 수 없었다. 파란 눈과 노란색 머리를 가진 외국 아이가 동네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두려워해서 공격했다. 아이들이 비둘기에게 돌을 던지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라는 말에 적지않이 놀랐었다. 저보다 한참 작은 동물인데 자기를 해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큰 아이가 길을 가다가 행렬을 지어가는 새까만 개미떼를 보고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은 적이 있었다.

실체가 없는 공포는 마음에 곰팡이가 피게 만든다.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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