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기가 막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이라니. 나는 그림책을 좋아해서 가끔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보곤 한다. 짧은 말에 담긴 맛이 천천히 입에 녹여 먹는 사탕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그림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올여름 한낮의 더위를 피해 도서관에 놀러 가서 그림책을 즐기다가 천천히 일어나는 참이었다. 서가에 꽂힌 '인생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만작가가 썼단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을 좋아하는 나는 대만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괜스레 그리워한다. '비정성시'에서 촉촉한 눈빛의 양조위를 처음 보았고 그가 다니던 길목을 괜히 그리워했다. 잊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대만에 다녀온 친구가 내가 좋아했던 비정성시에 나온 장소에 있다며 소식을 전해서 추억이 다시 살아났었다. 책을 들고 홀린 듯이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지미라는 작가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평생이 영화관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아들과 나도 영화를 좋아했다. 아들이 학원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가끔 심야영화를 같이 보러 가곤 했다. 스트레스도 풀 겸 밤늦게 조용한 극장을 들어서면 낮과는 다른 공기가 있다. 최동원 야구선수를 주인공으로 했던 영화를 보면서 아들은 훌쩍거렸고 ‘레미제라블’을 보고는 노래에 압도당했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심야영화를 보러 갔던 거 같다.
‘인터스텔라’를 보고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아이는 상대성이론이 궁금했던지 책을 찾아달라고 했다. 오래돼 갈색으로 변한, 양자에 대해서 문고판으로 나온 책을 대충 찾아줬는데 아들은 밤을 새워 읽고는 아침에 흥분해서 내게 영화를 분석한 결과를 조잘대기도 했었다.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상기된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부산에 놀러 가자고 아무리 꼬셔도 꿈쩍도 하지 않던 아들이 '국제시장'을 같이 보고 나서 돼지국밥 먹으러 부산에 가자고 했더니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삼십 대 초반에 우연히 들어갔던 자갈치 시장 끄트머리에 있던 작은 돼지국밥 집은 내 인생의 맛집이었다. 그 돼지국밥이 그리워서 아들한테 같이 국밥 먹으러 가자고 했던 거였다.
우리는 밤늦게 부산에 도착했고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열려있던 식당은 건물 일 층을 통째로 차지한 돼지국밥 전문식당이었다. 아들의 첫 '돼지국밥'이었다. 뚝배기에서 펄펄 끓었던,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숟가락을 멈출 수 없었던 나의 첫 돼지국밥을 아들한테 맛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들과 함께 먹었던 뜨뜻미지근한 돼지국밥은 정말 별로였다. 그런데 아들은 첫 돼지국밥 맛이 좋았었나 보다. 지금도 순댓국보다 돼지국밥을 더 좋아한다고 그랬다.
아들과 내가 무슨 추억을 함께 했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는 자주 영화관에 갔었고 밤새 둘이 나란히 앉아 방에서 애니메이션을 볼 때가 많았던 게 기억났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장면 곳곳에 숨겨진 상징을 얘기하기도 하고 서로 만화를 권해 줄 때도 많았다.
지금도 아들은 무슨 만화가 어떻다고 넌지시 권해주곤 한다. 아주 잔잔하다더니 진짜로 사건 없이 정말 잔잔한 만화라고 할 때도 있고 지난주에는 나보고 ‘체인소맨’을 봤냐고 물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부류의 만화라 안 봤다고 했더니 친구가 진짜 재밌다고 권해줬는데 자기 취향은 아니란다. 아들의 취향에는 내 취향이 묻어있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위주로 보러 가서 그런가?
우리의 취향이 맞았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도 아들은 참 좋아했었다. 그 영화를 다시 찾아보곤 했고 음악영화도 우리가 즐겨보던 장르였다. ‘라라랜드’나 ‘비긴어게인’을 보고 흐뭇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영화관을 나섰고 광기와 집착이 넘치는 ‘위플래쉬’를 보고는 멍하니 얼이 빠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방구석 영화관에서 우린 ‘싱스트리'를 봤는데 사춘기를 되게 겪던 아들은 그 영화를 다시 보곤 했었다. 웃지도 않고 말도 안 하던 사춘기 아들은 ‘해리포터’를 밤을 새워 보곤 했다. 아들은 저가 좋아하는 SF물이나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총 들고 설치는 영화나 온몸으로 때려 부수는 ‘범죄도시’ 같은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보러 가곤 했다.
얼마 전에 아들이 잠깐 들렀다. 저녁을 먹으며 요즘 '신임감독 김연경'을 본다면서 유튜브 영상을 보여줬다. 마침 나도 재밌게 보던 거라고 얘기하다가 배경음악이 '하이큐' 아니냐고 했더니 아들도 맞는 거 같단다. 우리의 이야기는 하이큐 시리즈로 이어졌고 나는 끝까지 봤다고 시리즈가 너무 늦게 나와서 책을 사서 완결을 봤다고 했더니 아들은 말하지 말라고 눈에 힘을 줬다. 그 시리즈를 천천히 기다리나 보았다. 우리의 추억에는 영화도 만화도 여전히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