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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May 05. 2024

사랑

  진짜 사랑을 한 적이 있을까? 누군가를 존재 그대로 사랑한 적이 있을까? 풋사랑도, 첫사랑도, 이별을 원치 않았던 가슴 아픈 사랑도 다 진짜 사랑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다. 마음의 떨림만을 사랑했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었던 것처럼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기억에 남은 사랑은 떨림이다. 가슴에 잔잔히 파도가 치고 그 파도를 타면서 내 감정에 몸을 맡겼던 거다. 그 감정이 사그라들고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 촘촘한 잣대를 들고 따지기 시작했다. 떨림이 사라진 상대에게는 질림만이 솟구쳤다.

  헤어지면 죽을 것 같던 사랑도, 사랑해서 헤어진다며 서로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사귀자는 말도 못 하고 흘려보낸 사랑도 모두 어딘가로 가버렸다. 미련조차 남지 않은 내 사랑들이다.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언젠가 엄마가 너는 고아로 자라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사랑에 집착하냐고 했다. 사랑에 애면글면 하면서 늘 사랑을 찾아다녔다. 쉽게 마음을 열고 쉽게 마음을 닫았다. 떨림이 시작되면 미친 듯이 상대를 향해 구애를 퍼부었고 상대의 시들함에 떨림이 사그라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어질 이유를 댔다. 나 혼자 사랑을 퍼붓고 나 혼자 사랑을 식혔다.

  늘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세상을 못 살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밤새 뒤척이고 헤어질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 없이 잘만 살았다. 며칠이 지나면 밥도 잘 먹고 잘 자면서 씩씩하게 살았다. 마치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다.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금방 잊을 수 있냐고 미련이 전혀 안 남느냐고 물었다.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 감정의 찌꺼기조차 없었다. 혼자 안달복달을 하고 사랑을 꿈꾸고 갖은 애를 썼으니 나를 다 태워버린 후라 그런가 늘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사랑했다면 달라졌을까? 내 진심은 진짜였을까?

  내 존재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았다. 그런 사랑은 꿈이었나 보다. 내가 바랐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인정이었나 보다. 내 20대는 사랑에 집착하고 사랑을 구걸했다. 무엇 하나 내 뜻으로 되는 것이 없었다. 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과외를 했다. 꿈은 점점 멀어져 갔고,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게 됐다. 다른 친구들이 꿈 없이 부모님이 정해 주는 전공을 선택하고 무난하게 삶을 이어갈 때 나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꿈은 좌절됐고 나는 점점 흐려져 갔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학업도, 취업도 변변치 않아서 늘 풀이 죽어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도닥거려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위로가 필요했는데 그걸 사랑이라 착각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떨림에 너무 취했었다. 사람에 대한 떨림이 아니었다. 그가 누구든 상관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떨림을 잊은 지가 오래다. 이젠 누군가를 만나도 떨리지 않다. 지난한 사랑의 실패들로 감정이 무디어졌다. 이제는 그렇게 마음의 흥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 제대로 된 사랑을 못 해봐서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내가 사랑했던 건 결국 나 자신밖에 없다. 떨림도 질림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거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나보다 더 위해본 적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이 없다. 흥분에 마음을 맡길 것이 아니고 사람에 마음을 주어야 할 것이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온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한다는 건 사랑이다. 그가 걸어온 세월과 내가 걸어온 세월이 잘 녹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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