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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Oct 16. 2024

석가탑

  여명의 석가탑은 웅장했다. 새벽빛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석가탑의 묵묵한 묵직함을 넋을 놓고 바라봤었다. 해가 떠오르도록 자리를 옮기지 못했다. 다보탑의 화려함은 석가탑에 압도당해 보이지도 않았다. 석가탑에 혼을 뺏겼다. 석가탑은 새벽에 봐야 한다.

  가을여행이었다. 사촌언니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촌형부와 두 외숙모와 함께 떠났었다. 일찍 출발하자고 해서 밤 12시가 좀 넘어서 출발했던 거 같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았고 불국사가 어떻겠냐고 경주로 가보자며 떠들썩하게 시작한 여행이었다. 밤에 출발해서 차 안에 깨어있는 사람은 나와 운전하는 형부뿐이었다. 길치인 형부가 오밤중에 길을 헤맸다. 양평 소머리 국밥집을 좀 전에 본 거 같은데 스치고 또 스치길 서너 번 한 끝에 드디어 다른 길로 들어섰다. 지도도 없고 네비도 없이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길눈이 밝은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막연함에 익숙해서인지 사촌언니는 잠에 푹 빠졌고 같은 국밥집을 서너 번 확인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새벽 여명에 도착한 곳이 불국사였다.

  불국사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갔던 곳이다. 아이들을 잔뜩 부려놓은 불국사 마당은 좁아 보였고 떠들썩했다. 대낮의 쨍쨍한 햇빛 속에 다보탑만 눈에 띄었다. 십 원짜리 동전에 양감 된 다보탑의 날아갈 듯한 화려함은 현장에서도 빛이 났다. 십원 동전에 새겨진 다보탑을 실제로 봤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석가탑은 오히려 구수해 보였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동네 어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 달리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돌덩어리를 무심하게 툭툭 얹은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느라 바쁜데 다보탑이며 석가탑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경주의 모든 곳이 그랬다. 첨성대의 작은 크기에 놀라고 천마총도 줄 맞춰 들어가 훑어보고 나왔으니 기억에 남은 문화재가 없다. 경주에 널린 구릉을 뛰어다닌 기억은 선명하다.  

  새벽에 도착한 불국사의 정적이 가득한 마당을 가로지르면 두 탑이 제대로 보인다. 석가탑은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크고 육중한 돌덩어리가 아니다. 날렵하지 않고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새벽빛에 도승처럼 빛난다. 이십 대 중반에 석가탑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새벽에 길을 헤매지 않고 일찍 도착했어도 어둠 속에서 석가탑을 제대로 못 봤을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시각, 그 자리에서 석가탑을 만났다. 웅장하다는 말은 새벽빛에 바라본 석가탑에 걸맞다. 어둠 속에 드러나는 묵직한 자태가 그러했다. 흔들리지 않고 세월을 버티고 선 거인 같았다. 기억에 울림까지 각인된 몇 안 되는 장면을 다시 볼 수가 없다. 한참 전에 새벽의 석가탑을 보고 싶어서 찾아갔었는데 불국사는 관광객에게 새벽 시간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시 볼 수 없는 그 찰나가 아쉽다. 그 새벽에 아무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여명에 모습을 드러내는 석가탑에 감탄하고 절로 숙연해지고 마음이 벅차오르느라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진 한 장은 그 시간, 그 자리에 머물지만 마음에 찍힌 사진은 늘 새롭다. 마음에 찍힌 사진은 다행히도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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