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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게 이기는 거라 했던가

봄이 오자 날은 좋아지고 난 안 좋아졌다.

 "지금 몇 시야?"

 "왜? 배고파서? 자기가 좀 챙겨먹으면 안 돼?"

 "...아니, 나 그냥 정말 시간이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내가 단순한 질문을 하면 아내는 그 질문에 숨은 뼈를 붙여 알아듣곤 한다. 문제는 순살치킨처럼 한 말도 뼈해장국처럼 들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 하나 했을 뿐인데 핀잔과 타박을 들을 때가 있다.

 최근에 운전을 하며 내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근데 옆에 타있던 아내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웽앙웽알웽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적인 명상 기법 중에 하나인데 스트레스가 쌓일 때 하곤 한다.) 순간 '어, 내 노래가 듣기 싫은 걸까?' 싶어


 "소리 듣기 싫어?"

 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느낌이 쎄했다. 이 냉기 오랜만이네. 이거 삐친건데...

 다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으응...? 대체 왜?


 "왜 갑자기 말이 없을까? 우리 OO이?"

 "..."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기분 나쁘게 해버렸는가?"

 "...듣기 싫다며. 그러니까 말을 안 하지."


 아. 나는 내 목소리가 듣기 싫냐는 거였는데 아내는 자기가 내는 소리를 내가 듣기 싫다고 한 줄 알았나보다.

 "어? 아냐. 내 노래 듣기 싫은 지 물어본 거야. OO 말 듣기 싫다고 한 게 아니고."

 바로 해명했다. 그러나 이미 기분이 상한 아내는 이후 대답이 없었다. 무려 이틀 간.

 이럴 때 괜히 건드렸다가 꼬투리 잡힐 말이라도 하면 이틀 갈 냉기가 일주일로 늘어난다. 가슴 가득 인류애적 사랑을 품고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일상의 농담을 가끔 던져가며 도를 닦았다.


 익숙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기를 약 52시간. 아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름의 생각을 마치고 감정이 가라앉았나보다.


 "넌 나한테 죄책감을 주는 것 같아."

 "응? 죄책감?"

 "이번에는 내가 잘 못 들은 게 맞으니까 오해에서 시작했지만 어쨌든 듣기 싫다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 다음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이럴 때 자기는 맨날 듬직하지 못 하게 힘들어하고 불쌍한 척 하는 거 같아. 자기가 그렇게 하면 난 죄책감이 들잖아. 신경 쓰이고."


 어.... 아.... 음... 어.... 그... 어.. 그래...

 속에 올라오는 다양한 변명과 반박을 삼키며 아내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다. 내가 그간 했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말과 행동을 한창 듣고나서야 아내는 일상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여기에서 무슨 말을 더 하리. 자고로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했다. 여기서 굳이 상대방에게 팩트를 강조하며 내 억울함과 위신을 지켜봤자 뭐 하겠는가? 누를 사람이 아니라 같이 살 사람인데. 겉으로 열심히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졌고, 마음으론 당당히 이겨내었다. 아이고, 숨막히는 이틀이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괜스레 죄책감을 줄 수 있음은 이해하니까.


 일정이 있어 아내와 함께 차를 탔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경로라 가는 길에 경리단길, 남산공원 등이 보였다. 봄이었고, 꽃이 만발했다.

 길목에 유채색이 번지자 아내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한창 창문에 매달려 꽃 구경을 하던 아내가 말했다.


 "넌 미안해 해야 돼."

 "응?"

 "나 경리단길 한 번도 안 와봤단 말이야. 우리가 만난 게 얼만데."


 ...누가 보면 데이트 한 번도 안 간 사람인 줄 알겠네. 서울 아닌 다른 곳은 많이 간다. 바로 그그저께도 우울해보여서 대부도 드라이브를 함께 했던 차다. 미안해 해야 하나...?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아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여기서 굳이 상대방에게 팩트를 강조하며 내 억울함과 위신을 지킬 필요는 없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마음을 굳게 먹은 뒤 속으로 생각했다.


 '...지는...'


 음, 마음으로 당당히 이겨내었다.


 PS : 재밌게 쓰기 위해 약간의 각색이 들어갔습니다. 아내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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