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강의를 하다 보면 진행하는 수업에 따라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학생들을 만날 때가 있다.
회사에 제출할 토익 서류 준비 때문에 왔다면서
강의실에 들어오는 대기업 부장 아저씨
자녀들이 하와이 여행을 보내준다고 해서 영어 회화 배우러 왔다면서 늙어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툴툴대면서도 제일 열심히 하시던 할아버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있는 고3 아들을 대신해서 오셔서는 다른 학생들 방해될까 강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필기하시던 아주머니
그리고 또 하나의 특별한 사례는 바로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혹은 외국인 신분의 학생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시절까지 보내다 한국으로 오게 되어 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
가족 이민 때문에 어릴 때 해외로 나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학생
등 많지는 않지만 여러 각자의 사정을 각진 학생들을 만날 때가 있다.
영어를 말하는 유창함을 따지자면 이들은 웬만한 강사들보다 뛰어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와 이들은 수능을 위해 학원에서 만났기 때문에 다행히도(?)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고민은 늘 똑같았다.
쌤 저는 미국에서 살아서 영어는 잘하는데 1등급이 안 나와요
90점을 넘으면 되는 1등급이 문제가 아니라 80점이 필요한 2등급이 안 나오는 사례도 있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수능 지문이 원어민들도 이해 못 할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문장들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한국 영어 시험의 난도가 높아서?
헤이 요 썹 맨~ 이런 말만 유창하지 공부는 못하는 학생이라서?
언어학자인 미국 MIT 공대의 스티븐 핑커 교수에 따르면 6세부터 사춘기까지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나이라고 한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의 뇌 신경학자인 폴 톰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6세에서 13세까지가 뇌의 언어 영역이 발달하는 시기라서 이때가 언어를 학습하는데 최적화된 시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초등학교 졸업까지 영어권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살았던 학생들은 영어에 대해서는
평생을 걱정 없이 사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잘 읽고 잘 말하고 잘 듣고 잘 쓰는 것은 별개이다.
우리 모두도 한국어 원어민이지만 모두가 아나운서만큼 또박또박 잘 말하고 논문이나 연설문 등과 같은 전문적인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외국에서 살다가 온 학생들이 수능 영어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모국어가 영어일지라도 영어를 잘 읽고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나는 수능 강의를 할 때 가끔씩은 어려운 난이도지만 공부하기에 좋은 문제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글로 번역해주고 국어시험이라 생각하고 풀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성적과 이해도는 나의 예상대로 영어 원본으로 풀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익숙한 언어라서 조금 더 잘 이해가 되어 정답률이 높아질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글 자체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이해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시험에서 만나는 모든 영어 지문이 논리적이고 깔끔한 문장으로 잘 쓰인 좋은 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험이기 때문에 이를 잘 이해하고 분석해서 풀어야 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말한 적이 있다.
외국에서 살다온 학생들에게 필요한 능력도 바로 이 능력이다.
이들은 언어에 대한 익숙함과 유창함은 갖추었지만 시험에서 요구하는
소위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빠르게 다 읽는다.
그리고 또 읽고 또 읽으며 이게 무슨 말이야 하며 지문과 씨름을 하다 보면 시간은 지나고
결국 오답을 고르거나 맞춰도 다른 문제를 풀 시간이 부족해지곤 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일반적인 한국의 학생들처럼 영어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만 쌓이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평생 살아온 친구들도 동화책이나 쉬운 소설책은 술술 읽고 이해를 잘 하지만
수능 국어 시험을 보면 시간 내에 다 풀지 못하거나
지문을 잘 읽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해서 틀리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살다온 학생들도
영어가 아무리 익숙하다 해도 수능에서 만나는 영어 지문들이 쉬운 소설책 난이도가 아니기 때문에
대충 읽고 쉽게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문해력이다.
한국의 많은 학생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영어에 대한 문해력이지만
이들에게 영어는 한국 원어민 학생들보다 영어가 익숙하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 써서 글의 논리를 파악하고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연습을 해준다면 문해력이라는 무기를 더 빠르게 장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짚어주고 연습을 시켰더니 한 학생은 방학 기간이 지나면서 읽기 능력이 많이 좋아져서
수능 점수 향상은 물론이고 훨씬 어려운 해외언론의 사설이나 전문기사까지도 더 잘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며 나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언어는 도구이다.
한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글 속에 들어있는 논리와 생각을 읽어내고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도구를 모으고 도구의 사용법만 익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나 스스로도 가끔은 영어라는 도구 속에 갇혀서 허우적대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명심하자
언어는 도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