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의 시간 epi. 10
아버지는 우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찬을 만나면 아버지는 언제나 옆자리에 앉았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밥을 먹을 때 빼고는 언제나 옆자리를 고수했다. 그리고 한쪽 팔을 슬그머니 뻗어 우찬의 손을 꼭 쥐고는 못 놓겠다는 듯 깍지를 끼기도 했다.
어릴 땐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쓰다듬었지만 고등학교 간 뒤로는 웬만하면 그것만은 삼가했던 아버지가 아주 오랜만에 우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보라 때문이라고 우찬은 속으로 날씨 탓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 가득한 스킨십에 익숙해있던 우찬은 귀찮으면서도 반갑고 시큰한 마음이 들었다.
해찬이 형에게 심한 자폐 증세가 없었다면 아버지의 이런 사랑이 형에게도 똑같이 뿜어져 나갔을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형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일 감수성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채 태어났고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사랑을 우찬에게 몰입해서 쏟아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사촌동생인 작은 할아버지네 아들과 함께 광어 양식장을 운영했지만 틈 나는 대로 어머니 곁을 맴돌았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고 기를 쓰며 아버지를 밀어내는 어머니 때문에 해찬이 형에게는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닥치면 바로 어머니를 도왔다. 그러고선 언제나 우연히 옆에 있었던 것처럼 툭 던지곤 했다.
"나영 조끄트레 이서그네 다행이지 무사 혼자 이서시민 이녁이 잘도 힘들 뻔해서."
(내가 가까이 있어기에 다행이지 어째 혼자 있었으면 당신이 진짜 힘들 뻔했다.)
생색내는 척 말하곤 또 바쁘다며 후다닥 사라지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대꾸도 없었지만 한숨 돌리며 뒷 곁 우영팟에 앉아 잠시 쉴 틈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우찬은 알고 있었다.
형의 증세는 우찬이 성장하는 것에 비례해서 어머니가 집에서 돌보기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해찬이나 우찬 모두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해찬의 몸무게가 상당히 늘어나고 있어서 어머니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는데 자해하거나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증세는 치료를 통해 근본적으로 줄어들거나 좋아지지 않았다.
서울에 있던 우찬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해찬의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다. 대입을 앞둔 우찬에게 두 분이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우찬으로서는 형이 그저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찬은 잦은 자해로 팔뚝과 허벅지에 상처의 염증을 달고 살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협조해서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를 때마다 발버둥 치는 바람에 셋이 모두 다치는 일이 빈번해져서 입, 퇴원을 반복하는 일이 잦았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장기 입원시키라고 권하였지만 어머니는 응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약물요법이 주된 치료 방법이라서 기운 없이 누워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인지라 어머니는 자신의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형을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던 어느 날 퇴원시켜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편의점에 들르려고 정차한, 눈 깜빡할 사이에 해찬이 차 문을 열고 도로로 뛰쳐나갔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열렸던 차 문과 형이 작은 트럭에 치어 한꺼번에 날아갔고 두 대의 차가 한 바퀴 돌아서 운전석에 있던 아버지도 트럭 운전사도 부상당한 사고였다. 뒷좌석 형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잠깐 문을 열고 나와서 문을 닫고 편의점을 향해 두어 발자국 걷던 어머니는 등 뒤에서 나는 엄청난 굉음에 뒤를 돌아봤다가 끔찍한 사고를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다시피 했다.
형은 중환자실에 들어갔고 실신한 어머니와 가볍게 부상 입은 아버지, 같이 다친 사고차량 운전자까지 모두 병원으로 실려 가야 해서 제주시 여러 곳의 구급차 네 대가 쫓아와야 했던 사고라고 했다.
형이 타는 자리의 뒷문을 습관처럼 잠궈놓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날 그 문이 열려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형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버티다가 세상을 떠났다. 우찬이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지 육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트럭운전자에게도 미안해하느라 오래오래 힘들어했던 일이었다. 형을 다 키우고 평균수명 가까이 돌보았지만 두 분이 치러야할 자식 잃은 고통을 헤아리기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찬 앞에서 어머니나 아버지는 고통이나 슬픔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치 형 해찬이 원래부터 부재했던 것처럼.
형이 떠나고 주위에서는 어머니가 스스로를 탓할까봐 염려했다. 어머니가 해찬이 형에게 가능한 모든 힘을 최대한 다 쏟아 부으며 돌보았던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해찬이 외에는 그 어떤 일들도 어머니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외곽을 방어해 줬다.
우찬에게 고향집은 언제나 형 해찬의 집이었다. 고향집 가운데 방에는 늘 소리를 지르거나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해찬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고 해찬의 주위를 철통같이 지키느라 분주한 어머니가 있었고, 어머니를 감싸고 돌봐주느라 바쁜 아버지가 있던, 형 해찬의 성이었다.
형이 세상을 뜬 후, 어머니에게 또 다른 아들 우찬이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잊지 않았기를 우찬은 조금 기대했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얻기 위해 형의 죽음을 기대해 본 적은 아마도 없었다. 그럴 정도로 어머니의 정에 갈급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우찬을 바라봐주길 바랐던 건 조금은 진심이었다.
친척들도 동네 사람들도 이제야 어머니가 좀 편해질 것이라고 기대했고 우찬이가 이제야 어멍 품에 들어가겠다고 소근거렸다. 하지만 형이 세상을 뜨고 어머니에게 찾아온 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형의 장례를 치르고 오랫동안 밭은기침을 하며 피곤해하던 어머니의 건강검진 결과 양쪽 폐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소위 빅파이브라 칭하는 서울의 한 암센터에서 림프 전이를 찾아내 수술과 방사선치료, 항암 주사로 일 년을 넘게 치료에 전념했지만 골반 뼈로 전이되었다. 내장이나 뼈 또는 뇌로 전이가 진행된 암을 4기 암 또는 진행성 암이라 불렀다. 어머니의 경우 더 이상 수술이나 항암주사 혹은 방사선치료가 효과적이지 않아서 면역항암제나 표적항암제를 써야했고 일년쯤 지나니 내성이 발생하였고 한 달에 천 만원이 넘는 비급여 신약을 쓰는 단계가 되었다.
어머니는 제주로 내려가겠다고 결정했다. 정기적인 검사와 항암제 처방 등의 표준 치료는 제주의 대학병원 암센터에서 하기로 했다. 항암제 부작용이나 암으로 인한 통증관리 등을 집중적으로 돌봐주는 요양 병원이 비교적 가까이 있어서였다. 시 외곽에 있는 암 전문 요양병원은 제주의 동쪽을 비교적 빠른 속도로 가로지를 수 있는 번영로를 따라 움직이면 병원으로부터도 집으로부터도 30분이 안 걸리는 거리였기에 아버지도 고민 없이 어머니를 제주로 모시고 내려갔다.
암환자를 전문적으로 돌봐주는 요양병원들이 그러듯이 주로 비급여 항목에 해당하는 고가의 면역강화와 관련된 약물과 고주파 온열치료가 주로 이루어졌다. 식이요법으로는 유기농채소와 두부나 콩 중심의 양질의 식사를 제공해 주었고 비용과는 관련 없었지만 가끔 해녀들의 잠수병 치료나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들을 위한 고압 고농도의 용존 산소통 체험을 주기적으로 할 수 있었고, 곶자왈 삼림욕과 삼양의 검은 모래 해변을 맨발로 걷는 어씽 산책도 매주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
해수욕장의 검은 모래 해변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맨발 걷기 명소라서 육지의 암환자들 중에도 바닷가 맨발 걷기를 위해 해수욕장 인근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며 아버지는 동쪽에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전화기 너머 어머니 상황을 알릴 때마다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어머니의 폐암 골반뼈 전이는 비교적 나쁜 예후에 해당되었다. 어머니는 지독한 하반신 통증에 시달리며 걷는 것을 힘들어했고 자세도 구부정해졌다. 아버지보다 큰 키에 여전사 같던 체격의 어머니가 깡말라지고 구부정해지자 아버지보다 훨씬 왜소해 보였다.
어머니의 그 모든 투병 시간 동안 우찬은 자신의 삶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이었다. 수술과 힘겨운 항암이 이루어지는 기간은 우찬의 군복무 기간이었다. 휴가 때마다 우찬은 언제나 어머니가 계시는 대학병원이나 어머니가 머물던 대학병원 근처의 요양병원에 드나들었지만 어머니는 우찬이 병원에 와서 당신의 병시중을 드는 걸 극도로 미안해했다.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표현이 가끔은 지나친 거부처럼 나타날 때가 있어서 우찬의 마음이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익숙했던 어머니의 감정 표현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어서 우찬의 서운함은 언제나 제정신을 부여잡고 덤덤한 쪽으로 넘어가곤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그런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것을 우찬은 눈치껏 알아차리며 컸다. 더구나 아주 어린 갓난아기 때부터 아버지의 품 안에서 자라다시피 했던 우찬이 였던지라 어머니를 향한 애정의 갈망이, 결핍이 주는 삐딱함으로 변질되지 않았기에 가끔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희미한 서운함마저 어쩌면 사회적 통념상 만들어진 감정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볼 때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본능적으로 서운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찬이 복학할 때 즈음하여 결국 제주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하루는 우찬이 알기로는 몹시 바빴다. 거의 매일 출근하듯 어머니를 만나러 요양병원에 들렀고 대학병원에 가는 날이면 요양병원의 셔틀버스보다 미리 도착해서 기다렸으며 셔틀버스가 바닷가에 가는 시간에도 미리 가서 접이 의자와 바람막이 옷을 준비해서 기다리다가 같이 해변을 걷거나 의자 주위에 서서 바람을 막아드리다 어머니가 요양병원 셔틀버스에 오르면 그때 양식장으로 되돌아가신다고 했다.
우찬에게는 점점 낯설어진 고향집이 아버지에게는 언제나 큰아들 해찬과 아내가 있던 곳이었고, 둘 다 없는 집이 너무 썰렁해지자 아버지는 아예 양식장 옆에 있던 외국인 직원들의 숙소에 작은 목조건물을 붙여 생활하셨다.
어머니는 본인이 암 환자가 되었다는 것에 크게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병원을 오고 가는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우찬은 어머니가 생각보다 담담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여전히 어머니는 여전사 같다고 느꼈다. 다만 어머니에게 가장 어려운 상황은 우찬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해찬이 형이 세상을 뜨고 한동안 우찬을 더 낯설어했다.
해찬과는 살가운 감정의 교류가 불가능해서 언제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상황을 통제해야 하거나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다져가며 살아야 했고 우찬은 어린 아기 때부터 밀어낸 상태였으니 갑자기 살갑게 굴 수도, 진즉에 지쳐서 깊숙이 숨어버렸을 다정다감한 모성애 같은 것을 불러낸다고 그게 냉큼 올라오지도 않을 거였다.
해찬에게 향했던 맹목적인 책임감의 무게가 어머니를 얼마나 고달프게 했는지 우찬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여전히 낯설어하고 민망해하는 지치고 병든 어머니에게 모성애를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이닥친 암의 등장에도, 썩 좋아지지 않고 암이 계속 진행되는 것에도 덤덤히 반응하듯이, 아니 어쩌면 덤덤한 척이라도 하듯이 우찬도 어머니가 편하도록 똑같이 덤덤하고 무심하게 대해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봄이 오면 어머니는 요양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좋아져서는 아니었다. 표적치료제도 일 년이나 일 년 반이 지나면 내성이 찾아왔고 이제 더이상 바꿀 수 있는 항암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임상약을 쓰는 것도 완강하게 거부했다. 아주 나빠지면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집에서 쉬고 싶어 하셨다. 그래도 제주에 돌아왔기에 잘 버틴 것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겨우내 몸과 마음이 바빴다.
몇 년을 비어있던 집을 손봐서 따뜻한 온기가 있는 집으로 바꿔놔야 했기 때문이었다. 집에는 편백나무와 황토로 마감한 아궁이 찜질방이 이미 있었지만 요양병원에서 지내느라 사용을 하지 않아서 제대로 가동되는지 살펴보고 부스러진 곳을 찾아 복구해야 했고 한라산 남쪽 산록도로를 가로질러 서쪽 중산간에 있는 작은 암자로 절밥을 배우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시면 직접 해먹이겠다는 각오였다.
눈이 내려서 한라산 남쪽 산록도로를 동서로 가로질러 다닐 수 없는 일 년 중 희귀한 하루이틀을 제외하면 아버지의 작은 체구를 태운 닷지 트럭이 언제나 제주를 동서남북 종횡무진 오고 갈 것임을 우찬은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우찬의 기억에 언제나 아버지는 바쁜 사람이었지만 늘 시간을 쪼개고 늘려서 어린 우찬을 최우선으로 돌봤고 어머니를 끊임없이 살펴준 최고의 가장이었다.
집안의 장손 역할도 당신의 사촌 동생들의 힘을 빌려 부족하지 않게 꾸려 갔고 집안 사업인 양식장 일도 열심이었다. 모래가 가득 깔린 깨끗한 해수 양식장에서 키우는 모살광어는 서울과 일본으로 수출하느라 바빴고 양식장에 일하러 온 외국 근로자들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오래오래 근무하며 가족들까지 데려와 살게 하거나 돈을 벌어 고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도와주곤 했다.
우찬에게는 아버지가 아버지이자 어머니고 놀이 친구이자 오랜 벗이었으며 삶의 스승이자 영웅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에게는 어머니도 해찬이와 우찬이도 다 아버지가 돌봐줘야 하는 애기들이었을 것이다.
우찬은 이제 다 컸다. 아버지가 돌봐줘야할 애기는 이제 어머니만 남은 지금, 우찬은 첫 번째 자신의 애기가 미리고 이제는 아버지도 돌봐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올랐다.
여전히 어리광 부리고 싶지만 가끔은 어리광 받아주고 싶은 아주 소중한 애기가 된 아버지가 쌍꺼풀이 크게 진 동그란 눈에 눈물을 비치며 우찬이 손을 붙잡고 이렇게 옆에 앉아 있다.
달달한 믹스커피를 즐겨 마시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암투병을 시작하고 나서 아메리카노로 취향을 바꿨고 아버지와 함께할 때면 우찬도 달달한 음료를 더 이상 주문할 수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계산하러 갈 때까지 아버지는 우찬의 손을 놓지 않았다. 우찬은 그런 아버지가 하나도 민망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아버지의 입이 양쪽 귀까지 걸려있을 때는 언제나 우찬의 손을 잡고 있을 때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조수석 온열이 안 되는 차라서 엉덩이가 시릴 거라고 아버지는 뒷좌석에 늘 가지고 다니는 담요를 우찬이 앉을 조수석에 깔아줬다. 눈이 이렇게 오래도록 내리는 일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일이라고 아버지가 날씨가 이상하다고 큰소리로 투덜거렸지만 우찬은 아버지의 그 말에서도 뭔가 정말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들뜸을 느꼈다. 아버지는 남극이나 사하라 사막에 있어도 우찬이만 옆에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하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찬은 문득 명치에서 한소끔 솟아오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아버지 옆에 앉으면 엉따 같은 건 굳이 필요 없을 터였다.
눈이 쌓여 군데군데 얼어붙은 길을 시내버스가 다니는 노선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함덕 바닷가에서 십오 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빙 돌아 삼양으로 돌아 봉개 쪽으로 가다 보니 사십 분 넘게 걸린 것 같았다.
요양병원 출입로에는 열선을 촘촘히 깔아서인지 포장도로가 눈에 젖은 채 드러나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도로 여기저기가 얼어붙어 있어서 차가 두세 번 미끌거리는 통에 우찬은 조수석에서 쓸데없이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며 버텨야 했다.
이런 날씨에 갑자기 제주에 내려와 아버지를 고생시키나 싶어 우찬의 속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아버지는 차가 잠깐잠깐 미끄러져도 재미있다며 놀이동산이라 생각하라며 우찬을 안심시켰다.
병원 로비 옆에 있는 따뜻한 식당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우찬은 간호조무사가 밀고 오는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우찬이 캐나다에서 사 왔던 몇 개의 울 담요 중 어머니께 드렸던 연한 주황색의 울 담요를 덮고 있는 어머니는 몇 달 사이에 몰라보게 더 야위어 있었다.
담요의 주황색이 어머니의 안색을 조금 보완해주고 있었지만 얼굴도 손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우찬이에게 했던 것처럼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보듬고 토닥거린 후 의자를 당겨 마주 보고 앉은 후 어머니의 양손을 잡았다.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수줍게 웃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우찬을 보고도 수줍게 웃었다.
어머니가 웃는 모습에 우찬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저렇게 편안하고 고요하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사람이 왜 벨롱한(반짝거리는) 눈으로 심장 두근거리게 웃고 그래.”
아버지는 설레어하면서도 익숙한 손짓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제 꿈에 해찬이가 얌전하게 놀다 갔는데 오늘은 우찬이가 엄마 보러 왔네. 좋은 눈이 내리고 있어서 그런가 봐.”
우찬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어머니가 평온하게 웃는 모습이 살짝 달콤하다는 느낌도 스스로 낯설었지만 우찬의 방문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표현하며 반기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아버지가 어머니 손에서 슬그머니 당신 손을 빼고는 우찬에게 눈짓을 했다. 우찬이 머뭇거리면서 어머니 손을 잡아보았다.
서울 병원에 있을 때도 몇 번 잡아보긴 했지만 어머니 손을 잡는 일도 우찬에게는 다소 벅찬, 드문 일이었다. 앙상해진 어머니 손등 위에 구불구불한 정맥이 푸르게 도드라져 보였다. 건조하지만 미끌거리는 아주 얇은 손바닥 깊숙이에서 미미하게 어머니의 체온이 올라오고 있었다.
우찬은 아버지가 양보한 의자에 고쳐 앉아 어머니의 얼굴을,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우찬도 아버지를 조금 흉내 내어 왼쪽 손은 어머니의 오른손을 잡고 오른쪽 팔을 내밀어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져보았다.
"좀 어떠세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제주어를 쓰지 않았었다. 아버지의 제주어에 딴지를 건 적은 기억에 없었어도 어린 우찬이 제주어를 쓰면 어머니는 아주 빠르고 단호하게 표준어로 교정해주곤 했다. 그래서 우찬은 어머니와 대화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곤 했었는데 아주 편하게 아버지에게 말하듯 말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우찬이 물었을 때 우찬은 내심 어머니가 우찬의 손으로부터 얼굴을 뒤로 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찬에게 잡힌 손도, 얼굴도 뒤로 빼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만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자꾸 옆에서 훌쩍거린 통에 어머니의 눈물주머니에 구멍이 난 것이라고 우찬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탓을 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우찬 앞에서 울다니.
우찬도 아버지도 참을 수 없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어머니의 통곡과 두 부자의 훌쩍거림에 식당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간호조무사가 얼른 냅킨 통을 가져다가 세 사람 가운데 두고는 눈가가 벌개져서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조리실 안에서 점심 준비에 분주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배식구 앞으로 얼굴을 내밀어보다 셋이 동그랗게 머리를 모으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다들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얼른 안으로 피해 줬다.
우찬도 아버지도 어머니의 울음을 막지 않았다.
어머니는 울어도 되었다.
진즉 울어야 했다.
우찬 앞에서 펑펑 울어도 괜찮은 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는 가끔 울곤 한다는 것을 우찬은 알고 있었다. 삶을 원망하면서 울고, 자책하면서 울고, 해찬이와 우찬이를 불쌍해하면서 울고, 여러 가지 이유가 어머니로 하여금 울게 하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도 우찬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뒤꼍 높은 돌담에 가려진 우영팟이나 물 부엌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어머니를 본 기억이 마음에 무겁게 새겨져 있었는데 어머니가 폐암 진단을 받자 때때로 아프게 떠오르곤 했었다.
형 때문에라도 담배를 끊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의 금연은 쉽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무래지도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중 순한 담배로 한보루씩 사다가 물부엌 선반에 올려놓고는 했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 한 번씩 울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흡연량이 훨씬 많았을 것이고 어머니의 병은 형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크게 도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치지 않고 삶을 보듬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보다 키도 크고 기골이 튼실했던 전사 같던 어머니, 형 해찬의 궂은 일들을 굳이 혼자서 감당해 나가려던 고집 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기대어 한 번씩 울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번 얘기했던 걸 우찬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바탕 울고 난 후, 우찬과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가족들이 방문할 경우 병원 밥을 같이 먹을 수가 있는 곳이었고 아버지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병원에 연락하여 아들 몫까지의 식사 요청을 미리 해놨었다. 환자들의 밥은 모두 병실로 올라가고 직원들 식사도 시작되었지만 방문 가족 식사는 우찬이네 뿐이었다.
울어서 지친 어머니는 식사량이 많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밥을 깨끗하게 비웠고 우찬도 비교적 잘 먹었다.
더 편해진 얼굴이지만 조금 더 지친 어머니를 병실까지 모셔다 주고 내려온 아버지와 다시 함덕으로 돌아온 우찬은 호텔에서 가방을 꾸려나왔다. 아버지와 함께 양식장에 들렀다가 따뜻하게 보일러를 돌려놨다는 양식장 옆 아버지의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이상기후나 다름없는 추위에 양식장을 자주 확인해야 했고 우찬이 특별히 도와줄 일은 없을 터지만 옆에만 따라다녀도 아버지는 신이 날 것이었다.
미리에게서는 여전히 문자가 없었다. 우찬 역시 미리에게 미주알고주알 문자 보내는 것을 삼갔다.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어떻게 이렇게 길고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가 지금 진짜 우찬의 애기인지, 앞으로 자신의 애기가 될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내일 눈이 그치면 그때부터 미리의 시간들이 고단해지겠지만 그건 그녀가 감당해야 하고 돌파해야 할 순간들일 것이다. 쉴 수 있을 때 그녀도 힘을 비축해야 할 것이다. 우찬은 미리의 오늘이 충분히 재충전될 수 있는 시간들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