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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짧은, 어둡고 시린

미리의 시간 epi. 12(할머니의 시간)

by 우유강

미리의 할머니, 현비유인김해 김씨(안례)의 삶

그의 삶이 다른 누구보다 특별하게 애달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바라보는 공유된 하나의 분별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던 지역 사회가 그를 대하는 분별 기준은 시대에 따라 형성된, 공동체의 세계관에 의해 규정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의 삶은 또한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분별 기준이 결정되고 각자의 경험에 의해 각색되고 색칠된다. 따라서 개개인이 지닌 잣대에 따라 물리적이고 추상적인 옷을 덧입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가족들이 바라보는 그에 대한 분별은 가족 개개인이 지니는, 공유했던 삶과 그 사람에 대한 욕망이 깔린 기대치와 욕망의 충족도에 따라 심도가 다른 갈증을 그 분별의 바닥에 깔아놓기 마련이다.


아주 높은 곳에서 아주 빨리 시간을 되감아가며 사람들의 삶의 모든 순간들을 시시콜콜 되짚어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어도, 고달팠던 한 시절의 역사, 그 어디보다 더 고달팠던 섬.

제주에서의 삶 속에서 태를 묻고 살다 뼈를 묻고 사라진 지난 시절의 모든 사람들 각자가 영화 한 편쯤 찍어도 모자라지 않을 서사를 품고 있다는 건 지역사회가 바라보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한 분별이나, 남겨진 가족들 개개인이 바라보는 그의 삶에 대한 분별의 차이가 있을망정 부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미리의 할머니 김안례의 삶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떠나가고 있었다.

한 사람이 숨을 거뒀다고 그의 삶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위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다고 그를 당장 이미 ‘떠났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김안례는 원래 큰 무당이 살던 조천 중산간 마을의 언저리에서 큰 무당을 따라다니던 당골의 딸로 태어났다. 인근 마을을 아우르는 굿까지 하던 큰 무당은 심방이라 불렸고 안례의 고모부는 심방이었다. 심방은 큰 굿이 있을 때면 주변 마을마다 존재하는 작은 당의 무당인 당골들을 이끌고 다녔고 기중엔 피붙이들이 있어서 서로 도와가며 무업을 이어가곤 했다. 심방의 조카딸이라는 위치는 큰 무당에게 신을 물려받을 마땅한 자녀가 없을 경우 그 업을 물려받을 수도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오래전 오랫동안 제주가 탐라이던 시절 무당은 섬의 사제이며 권력자이며 모든 사람들의 치유자이자 부모나 다름없었다.

무당을 천시하는 유학의 나라가 육지에 자리를 잡고부터 육지의 수많은 절과 당들이 마을 변두리나 깊은 산으로 쫓겨나는 시절이 왔어도 천지만물에 일만 팔천 신이 깃들여있다는 제주에서는 그나마 밥 굶을 일 없는 위치가 심방이고 당골이었다. 해안보다 먹을 것이 더 변변찮은 곳, 중산간에서 가족들이 아프거나 삶이 고단해질 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처는 언제나 당골들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자질구레하게 병치레하며 커갈 때도, 다행히 잘 성장해서 결혼을 할 때도, 또 대를 이어 아이가 태어날 때도, 혹시나 돈이라도 만질까 하고 바닷가로 내려가 배를 타고자 할 때도, 용왕신에 끌려 들어가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어 혼백이나마 건져야 할 때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 날 때도, 어찌어찌 살다 무난한 나이에 죽는 날이 와도 당골들이야말로 삼백 육십 개가 넘는 오름들과 만리가 넘는다는 검고 구불구불한 현무암 밭담들, 무너져 내려가는 환해장성 안쪽으로 구석구석에 찡겨 몸 비비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가장 든든하고 어쩌면 거의 유일한, 세상 모든 것을 물어보고 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자 그 답을 줄 수 있는 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면서 신이었고 보금자리이자 끝내 몸을 기댈 안식처 자체였다.


하지만 오백 년 넘게 육지에서 유배되어 온 유학자들의 피붙이들이 태어나 아주 꼬장꼬장하고 강력한 힘으로 뿌리를 내리며 호족이 되어갔고 주자가례를 삶의 기본 틀로 삼았던 관료들이 번갈아가며 내려와 무속신앙에 불방망이 같은 철퇴를 내리는 일이 생기면서 제주 곳곳에 자생하는 고사리, 팔손이, 동백나무보다 더 많던 일만 팔천 신들은 차츰 설 곳을 잃어갔고 당골들의 위치는 차츰 추락하여 천대와 멸시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큰 무당의 계승서열에 올라있다는 사실 따위는 차라리 사람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고 여겨지는 때가 되었다. 그럼에도 안례는 고모부처럼 큰 무당이 되고 싶었다. 큰 당의 심방들은 씨가 다른 법이라고 들었고 믿었다. 올라가고 올라가 파보면 유배 온 육지 출신 유학자의 서출일망정 양반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작은 해안마을의 해신당 당골들에 비할 바 없는 대접을 받는 자리였다.

안례의 부모는 이차 세계대전 말 일군이 제주도 여기저기 굴을 뚫는 부역에 동원 나갔다가 차례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심방인 고모네는 자식을 병으로 모두 잃었었다.

고모 네는 자연스럽게 안례와 안례의 어린 젖먹이 동생 막례를 데려다 키웠지만 자식들을 다시 줄줄이 얻었으므로 안례와 막례는 곧바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제주보다 모시는 신들이 더 많다는 일본이었지만 그들의 식민정부는 조선의 모든 습속을 천시했고 무속은 갈 길을 잃었던 때였다.

귀하던 민가의 유기그릇들은 물론이고 굿에 쓰이던 유기 무구들마저 다 뺏기는 바람에 오래되어 사용하지 않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선대 무당들의 낡아빠진 무구들을 남몰래 땅에 파묻어 감춰야 했던 그 시절은 아무리 심방이라 해도 굶기가 밥 먹기보다 더 잦았던 때였으니 열 살을 조금 넘긴 안례와 안례의 등에 업혀 살던 막례가 굶어도 누구 하나 탓할 겨를이 없을 때였다.


칠성신의 복덕을 넘치게 받아서였는지 고모네에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자 안례의 등은 막례 차지가 못 되었다. 고모네 갓난쟁이들을 업고 사느라 안례의 등이 마를 날이 없었지만 안례는 불평하지 않았고 집안의 허다한 잡일들을 누구보다 눈치 빠르게 엽렵하게 해냈다.

안례는 자신에게 신기가 내리기를 고대하며 바랬지만 그게 도대체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아 애를 태웠다. 안례는 마을 굿도 제대로 못 올리던 시절 동네를 다니며 작은 액막이나 사소한 체 내림을 하던 고모와 고모부를 따라다니며 뭐라도 배우고 싶었지만 고물고물 연달아 태어나는 사촌동생들 때문에 그저 집에서 머물며 식모 노릇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늘 한탄했다.

안례는 초등학교 교문 안에 발도 제대로 못 디뎠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다. 고모와 고모부 옆에서 어깨 너머 뭐든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핏줄을 타고 내려온다는 신기 같은 것은 아무리 해도 그림자도 안 보였으니 습속이라도 익혀야 할 것이라고 그녀 나름의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그렇게 크며 해방이 되었고 좁쌀죽도 못 먹던 시기를 지나자 4.3이 세계대전보다 더 무섭게 제주를 휩쓸었다.

해류를 타면 육지보다 일본이 가깝던 제주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 조금이라도 먹물을 먹음직한 머리가 있는 자손이 보이면 온 가족의 영혼을 끌어 모아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에 갖다 댈 요량이 못되면 반대로 밀입국이라도 해서 일자리를 얻어 번 돈을 고향으로 보내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시절이었다.

머리 굵어진 유학생들은 당연히 독립운동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고 그런 유학생들을 이끌던 단체는 기독교 모임 아니면 공산주의 모임이었다. 기독교나 공산주의 모두 케케묵은 유교나 틀에 박힌 듯한 신학문 교과학습에 비하면 눈이 번쩍 뜨이고 천지개벽할 만큼 신박한 세계였지만 일만 팔천신이 다스리던 제주의 핏줄들이 일신교인 기독교에 익숙해지긴 어려울 터였다.

천지사방에 신들이 깔린 일본에 기독교가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을 고려해보면 육지보다 더 많은 비율로 제주 출신의 유학생들이 공산주의 모임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을 상황은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지만 그건 정치적 시류의 타이밍이 맞을 때 허용되는 말일 뿐이다.


해방을 맞아 돌아온 배운 자들은 제주 곳곳의 고향 마을에서 덜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들의 롤 모델이자 집성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신세계를 건설하고자 춤추며 돌아온 제주는 먹여야 할 입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고 제주를 먹일 식량은 대부분 배를 타고 육지에서 와야만 하는 최악의 생존환경이 되어있었다.


제주가 먹여야 할 입에는 원래 토박이 제주도민들에 더해 제주에 살던 일본인들 뿐 아니라 종전이 되었음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제주에 묶인 일본군들까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수는 삼만 가까이 이르렀다. 일본군은 연합군이 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걸 막는 마지막 방어진지로 제주를 삼았고 제주가 침몰할 때까지 버틸 요량이었기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서둘러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미 작살나버린 오키나와 다음으로 제주도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위태롭던 시절이었다. 그들이 몽땅 제주에 모여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묶여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점령군으로 새로이 주둔한 미군들과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제주도민들까지 와글거리며 아수라장을 이뤘다. 먹을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 도민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월급 좁쌀에 모래가 반이 넘게 섞여 나와서 눈 벌겋게 뜨고 항의해봤자 섬에는 여전히 일제 치하의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3.1 운동 기념식에 아이 업은 엄마와 어린 소년이 어처구니 없이 경찰에 의해 죽었고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파업과 소요가 서로 뭐가 먼저랄지 순서 가를 새도 없이 연이어 일어났다.

제주를 다스리던 미군정은 반탁운동에 이어 95% 가까운 파업을 두고 제주에 [붉은 섬]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렸다.

[붉은]이라는 딱지에는 공산주의자, 그들을 따르는 자, 그들의 티끌이 눈곱만큼이라도 묻은 자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공산혁명이 성공한 소련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기치를 높이 세우던 미국이 이차대전 이후의 세계를 가른 두 대척점의 정점에 있던 그 때, 서로는 적들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에 눈 질끈 감은 채 무조건 걸리적 거리는 것은 치고 패면서 전진하던 그 흑백의 시절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제주가 붉은 섬으로 낙인 받은 후, 중산간에 살던 모든 주민들이 해안으로 소개되었고 고모네도 여지없었다. 심방을 하던 고모네 가족은 어찌어찌 등 비비며 살 작은 밖커리(바깥채)라도 구할 수 있었지만 안례와 막례에게까지 따뜻하거나 시원한 방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모네는 안례와 막례를 내치지 않았고 대신 잠자리를 제공해주기로 했다.


어두운 밤, 울타리가 있어 두려움 없이 잠들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으니 겨울에는 불기 없는 고방이나 불기가 겨우 남은 정지 간에서, 가을이나 봄에는 풍채를 내린 마루에서, 여름에는 모기에 뜯겨가며 마루에서 잠을 청했고 두 자매의 먹거리는 언니 안례가 해안 선창가에서 잡심부름을 해주며 얻어와 해결했다.

막례는 순하고 늘 방글방글 웃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어린 막례 덕에 안례가 일거리를 끊임없이 구할 수 있었고 죽이라도 먹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또는 그 반대로 막례가 없었으면 안례가 좀 더 편하게 일신을 도모했을지 역시 모르는 일이었지만 안례에겐 어린 막례가 흐릿해져 가는 부모의 냄새를 품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막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 따위를 상상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안례와 막례가 소리 없이 성장하던 동안 육지는 위아래로 도륙이 났다. 남의 나라 종살이에서 벗어나자 이제 같은 형제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제주에서도 사람들이 말 없이 사라지기도 했고 때로는 동네방네 소란을 떨며 잡혀가기도 했으며 절차 없이 죽어나가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시절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죽은 이들을 위한 제사도 창문을 치마로 가려가며 표시 안 나게 치러야 하는 때였다.

조용한 공포가 침묵과 함께 제주 전체를 잘근잘근 밟아대던 시기였고 그런 때에는 그저 목숨 붙이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두 손 비비며 기도하던 시기였다.

안례가 처녀티가 나기 시작하면서 고모네는 안례를 정식으로 굿판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안례가 하던 아이 돌보기나 집안일을 초등학교 갓 들어간 막례에게 맡겨도 되었고 중산간으로 돌아간 뒤 굿판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해야 할 일거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고모네가 안례에게 심방을 대물림할 가능성은 없었다.

안례 역시 예전과 다르게 더이상 부지런을 떨지도 않았다.

사촌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면서 안례의 작은 야망도 조용히 사라지던 참이었다.


그러다 안례가 시집을 갔다. 고모네가 중신을 서서 김녕 해안 마을 강씨 총각에게 막례까지 혹 붙여서 시집을 보낸 것이었다.

강씨는 4.3 당시 이런저런 자잘한 정치적 혐의로 고문을 받아 다리를 절고 몸은 허약했지만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사람이었다. 다리를 절건 어쩌건 의지가지없는 안례를 막례까지 싸안아서 품어준 사람이었으니 안례에겐 하늘처럼 모시고 싶은 사람이었다.

밖커리, 모커리(대문 옆 외양간 혹은 창고)도 없이 마루를 가운데 두고 안방과 고방만 있는 시댁의 집에서 고방에 신접살림을 차린 안례는 시동생들까지 있는 시부모 방에 막례를 재울 수 없어 신방에서 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

천성이 부지런했던 안례는 동생 막례가 시가족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해가 진후에도 한참을 호롱불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며 뭐든 돈 될 일을 했다.

고모네야 진즉 중산간 큰 당의 심방으로 되돌아가 마을 굿들을 하기 시작했고 뿔뿔이 흩어졌던 작은 당골들도 하나둘 모여서 일손이 부족하지 않았으므로 더이상 시집보낸 안례를 부를 일은 없었다.

안례도 고모네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로서 당골이 위대해 보였던 안례에게 굿거리 말고도 다른 밥벌이들도 많다는 것을 해안마을에 살면서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등 뒤에는 허약하긴 했어도 하늘같은 남편이 있었다.


안례는 아들을 둘 낳았고 둘째 아들을 낳을 때쯤엔 같은 동네에 정지가 딸린 방 한 칸을 세를 얻어 나갈 수 있었다. 막례까지 다섯 가족이 다닥다닥 붙어 자면 꽉 차는 방이었지만 방보다 마음이 더 꽉 차올랐던 안례는 행복했었다. 부모와 같이 살던 아주 희미한 기억 말고 이제 비로소 삶이라는 것이 그녀의 삶에 자리를 잡아가나 싶었다.

그런데 하늘같은 남편이 죽었다.

아들 둘이 생기자 남편은 돈벌이를 해야겠다며 안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뱃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겨우 두어 번의 출어 끝에 익숙하지 않은 너울을 만났고 뱃전에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바다로 떨어져 버렸는데 시신을 찾지 못하고 배가 돌아온 것이었다.

4.3과 전쟁으로 뱃구레가 커진 물귀신이 서투른 뱃사람을 삼켰다고 해안 사람들이 잠시 안타까워했지만 바닷가 마을이란 그러거나 아니거나, 뱃사람이거나 아니거나 때때로 허황하게 사람들 목숨을 삼켜버리는 일은 해마다, 마을마다 일어나는 일이었다.


시부모들은 다리 저는 남편을 뱃일에 내보냈다며 안례를 원망했고 안례에게 붙어 사는 막례까지 원망했다.

그들은 그들의 남은 자녀들을 여전히 돌봐야 했고 사망한 장남의 가족들까지 돌볼 처지가 못 되었다.

고모네는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조카사위의 넋드림 굿을 하기로 했고 해신당 당골과 함께 굿을 올려주었다. 안례의 남편은 한 줌 머리카락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혼령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안례는 시집올 때 겨우 이불 한 채 해준 고모네에 서운했던 마음을 모두 잊기로 했다.

시댁에도 서운함을 품지 않았다.

서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저 자신이 걸어가는 발밑만 보며 살아도 숨쉬기 바쁜 시간들이 아주 오래오래 지속되던 때였다.

안례는 살아갈 일이 까마득하였다.

오롯이 안례의 편이던 남편을 햇수로 오 년도 되지 않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원래 없던 것은 잃어지는 것이 아니니 원래 없는 복이라 치기로 하고서 겨우 치솟아 오르던 서러움을 모르는 척 벗어던질 수 있었다.

안례는 열두세 살을 갓 넘긴 막례가 좀녀(해녀)일을 배우러 다니는 것을 알면서 막지 못했다.

해녀 삼촌들은 어린 막례의 낯꽃이 고와 보기만 해도 기운이 난다며 안쓰러워하면서 사랑하며 반겼고 서두르지 않고 꼼꼼하게 하나둘 가르쳤다.

마을에서는 막례가 안례의 동생이 아니라 효녀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어린 좀녀가 된 막례는 모든 것이 어설펐지만 가끔은 작살질로 돔도 잡아와 굽고 귀한 전복도 한번씩은 집으로 가져와서 조카들과 갈수록 몸이 부실해져 가는 언니에게 먹였다.

전복보다는 돈이 더 필요했던 안례는 목구멍으로 전복 살을 넘기는 게 사치고 부담이었지만 막례는 언니 입에 탱글탱글한 전복 살을 조금이라도 넣어주려고 애를 썼다. 막례에게 언니 안례는 부모이며 하늘이었다.


한동안 맥없이 지내던 안례가 겨우 떨치고 일어나 시의 동문 통으로 나가서 머리 만지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막례의 가쁜 숨으로 벌어오는 피 같은 좀도리 돈이 안례의 버스비도 되고 가끔은 점심 값도 되었다.

입성 좀 가려 입으라는 미장원 주인 언니 성화에 안례는 나이론 블라우스에 치마도 사 입고 뒤꿈치 까지게하는 에나멜 구두도 사서 신었다.

처음엔 시다들이 그러듯이 대가 없이 미장원 바닥에 널린 잘린 머리카락을 쓸고 집기류들을 세척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고데하는 것을 배우며 다녔는데 그러다가 얼떨결에 남자를 알게 되었다.


안례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였다. 물질을 시작한 막례의 얼굴이 급속도로 까매져가는 동안 안례 얼굴은 점점 더 희어져 갔는데 누가 물어보지 않으면 아이 둘 가진 과부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미장원 근처에 이발소가 있었고 이발소를 드나드는 체격이 훤칠하고 인상이 시원하게 생긴 남자가 미장원 유리문 너머로 안례를 자주 바라보았고 미장원 주인 언니가 그의 부탁으로 안례를 소개해준 거였다.

그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주위에서는 그를 서청 현 씨라고 불렀다.

해방되자마자 이북에서는 공산당이 집권하자마자 지주나 배운 사람들, 기독교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 집과 땅을 잃었고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그저 맨몸으로라도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서북청년단에게 [붉은] 딱지가 붙은 제주는 쌓인 한을 풀어보고 싶은 곳이었을까.

서청이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제주에서는 무시무시한 권력이 되기도 했으므로 그들은 서청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반대로 제주 토박이들에게 서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두려움과 함께 가까이 하기를 꺼려야 할 사람들이었다.


서북청년단은 4.3 때 제주에 들어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성과를 내었지만 그 성과가 과연 자신들의 삶과 제주 토박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무어라 뚜렷하게 분석하거나 평가하여 말하는 곳이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주의 모든 곳에 그대로 자리를 잡았고 뿌리를 내렸으며 이북 말과 억양이 제주어에도 녹아들어 그게 원래 제주어인지 유입된 육지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4.3 희생자들이 70년이 지나서야 국가지도자의 사과를 받고 보상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었던 만큼 70년의 세월 동안 가해자라는 도구로 쓰였던 그들의 삶도 마냥 승리자처럼 승승장구하였는지 그 누구도 알아보려하지 않았다.

서청 현 씨는 교회를 다녔다.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곱닥하며 말수 적은 안례를 좋아했다. 안례도 금방 그에게 빠져들었다.

현 씨는 안례와의 결혼도 염두에 두어봤지만 그녀에게 전남편의 아들이 둘이나 있었고 아직 어린 처제까지, 딸린 혹이 셋이나 되는 건 적잖은 부담이었다.

주위에서는 현씨에게 처녀 신붓감들을 소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고민을 하자 그의 고향에서 같이 내려온 동무가 안례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그녀가 당골의 딸인 것을 알려주었다.

무당의 자식들은 나중에라도 신병 때문에 무당이 되는 일이 심심찮다고 안례와의 혼인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린 것이 어쩌면 안례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굳혔는지도 몰랐다.

더구나 소개받은 신붓감들 중에 역시 북에서 피난 내려온 목사의 딸이 있었다.

그는 고향 출신 목사어르신의 사위가 되는 일이 신의 놀라운 은총이라고 믿었다.

몸정이 들어가던 사이였지만 그가 이별을 이야기했어도 안례는 놀라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안례가 너무 덤덤해 보이자 현씨는 오히려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 했다.


안례는 도저히 그를 붙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혈혈단신 총각이었다.

고향도 아닌 곳에서 부모형제도 없이 의지가지 할 데 없는 남자에게 딸린 혹이 셋이나 되는 천애고아인 자신과 결혼해달락 하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염치없는 일인 것 같았다.

안례는 그를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가만히 보내줬다.

현 씨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되돌아가서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안례는 부끄러움을 무릅썼고 달이 차자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아이는 강 씨 형들과 달리 체격이 크고 얼굴이 희었다. 어미를 닮은 것인지 아비를 닮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을에는 궂은 소문이 떠돌았고 시댁 피붙이들은 대놓고 화냥년이라고 욕을 하고 다녔다.

현 씨의 아들을 홀로 출산하고 나서 안례는 마음병을 앓게 되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젖먹이를 집 안에 두고 홀로 바닷가를 돌아다니기 일쑤여서 어른 없는 빈 집에서 갓난아이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서 학교 다니랴 물 때 맞춰 물질 나가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막례가 맘을 졸이기 일쑤였다.

애기가 돌도 되지 않아 젖을 떼자마자 아이들을 막례에게 맡기고 안례는 다시 미장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비 없이 태어난 막내 때문에 어린 두 아들들도 바깥에서 놀림을 당했고 안에서는 끊임없이 우는 어린 동생을 어찌할 줄 몰라 예뻐하지 않았다.

예뻐할 수 없었다.

새 아비가 될지도 모를 사람이 짐 덩어리인 동생까지 얹어주고 어머니를 버리고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그에게 짐 덩어리로 취급되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뒷말에 두 아들은 상처를 받았고 자신들과 어머니, 그리고 이모에게 진짜 짐 덩어리는 울기만 하는 갓난쟁이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갓난 동생이 더 미웠던 것은 동생이 태어난 뒤로 어머니가 자신들을 돌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이를 돌보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 변해갔기 때문이었다. 어린 갓난쟁이의 존재 자체가 재앙이라고 믿었지만 해코지를 할 수도 없었던 것은 아기를 돌보던 이모 때문이었다. 때로는 어머니 보다도 더 많이 돌봐주는 이모의 미움을 받으며 클 수는 없었던 강씨 아들들이었다.


막례가 크게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아이 셋을 껴안고 살아가는 일이 안례에게 쉽지 않았다.

고모네 집에서 살 때도 끝없이 태어나던 사촌 동생들을 내내 업어 키우면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조금 고단할 뿐이었다.

주변에도 니 새끼영 내 새끼영 우리 새끼까지 키우는 집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서방이 될지도 모를 사내가 아이만 남겨놓고 다른 장가를 가버렸다는 건 안례에게 오랫동안 치욕이고 슬픔이었다.

남겨진 자식들이 소란스럽게 싸우고 울며 고물거리는 집 안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나 싫은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때때로 죽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달래며 안례는 미장원으로 도피했고 가끔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며 마음의 허기를 이기려 애썼다.

일이 손에 익고 푼돈을 모아 고데기를 쓸 수 있는 배터리를 구하자 안례는 현씨와의 추억이 남아있던 동문통의 미장원을 나왔다. 안례는 무거운 짐을 들고 해안을 훑고 다니며 동네 아낙들 머리에 고데나 파마를 말아주며 살아갔다.

안례가 이미 결혼한 현씨를 찾아간 것은 셋째 아이가 다섯 살이 넘어서였다.

아이의 호적이 여태 없었던 것이다. 호적도 없는 막내아들을 어떻게하든 국민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 끝에 안례는 하는 수 없이 남자를 찾아갔다. 학교를 보낼 수 있게 그저 호적에만 올려달라는 부탁하러 간 것이었다.

남자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처음에는 모르쇠로 잡아떼었다.

이미 결혼한 목사의 사위가 혼전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는 안될거 같아서였다. 더구나 호적에 올리려면 아내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잡아떼던 남자가 자꾸 찾아오는 안례에게 손찌검까지 하자 하는 수 없이 안례는 그의 아내를 찾아갔다.

결혼 전의 일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충격을 받았고 그녀는 목사 사모인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미장원으로 찾아와 안례에게 끝없는 모욕을 주고 돌아갔다.


기댈 곳 없던 안례가 며칠을 앓아눕자 막례가 들쳐 일어섰다.

늘 방글거리며 웃기만 하던 막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 일을 따지러 가야겠다고 나서자 막례를 딸처럼 사랑하던 좀녀 삼촌들 몇이 걸음을 보태었다.

그들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멀리 도시의 서쪽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그 마당에서 난리를 쳐댔다.

그저 호적에만 올려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으니 이제 양육비도 함께 내놓으라며 난장을 쳤으니 교회 관사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하였다.

현씨는 목사의 사위이자 교회의 전도부장으로 열심히 교회 일을 하던 중이었고 이제는 어린 자식들도 둘이나 기르고 있었다. 그의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좀녀 삼촌들 기세는 더 당당했다.

잃을 것이 많으면 두려움도 커지는 법이라며 이 싸움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라고 자신만만했다.

조선조 말에 유배 온 서학쟁이들 덕분에 교회보다 성당이 먼저 자리를 잡은 섬에서 예수쟁이들은 일찌감치 해신당이나 마을의 작은 당만 봐도 귀신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당을 떠나 교회로 오라고 전도해왔기 때문에 좀녀들의 예수쟁이들에 대한 반감이 없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의 굳건한 해신당 할망이나 용왕신에 대한 신앙이 묽어질 리 없었으니 그저 예수쟁이들을 소 닭 보듯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딸 같고 조카 같은 막례가 물질도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불턱에 앉아 울다가 어느 날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일어나니 말릴 일이 아니라 힘을 보태주자고 서로 마음을 모았던 터였다.

현 씨와 장인인 목사는 교회에 없었다.

장모와 그의 아내는 억세기로 소문난 동부 해안의 여장부들이 떼로 몰려와 소요를 일으키자 벌렁거리는 심장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야단이 났다.

미장원에서 보았던 안례는 만만해 보이는 여자였는데 안례의 배후에 이렇게 당당하고 사나운 자세로 잘못을 지적하고 나아가 교회에 허물을 입히려고 작정한 듯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쫒아올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모녀는 그녀들의 소란이 교회 담장 너머로 퍼질까 봐 두려워했다.

막례는 교회 마당 한쪽에 심어진 하귤나무 아래 아예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좀녀 삼촌들이 다음엔 일요일 예배시간 맞춰서 다시 올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까지 불사하고 있는 참에 신자들 가정 방문을 다니다가 소식을 들은 목사와 사건의 주인공인 현 씨가 부랴부랴 돌아왔다.


목사는 안례와 막례 그리고 증언을 해준다고 따라온 미장원 주인과 함께 딸 부부를 같이 불러 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미장원 주인에게서 안례가 자신의 아내와 딸로부터 시내 한복판에서 얻어맞고 망신을 당했다는 얘기까지 듣고서 목사는 망연자실 끝에 아내와 딸 부부를 호되게 나무랬고 딸에게는 아이의 호적을 허락하라고 단단히 당부하고서야 난리통이 끝났다.

막례가 누워 울던 하귤나무 근처에 모여 앉아 좋은 협상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길 기다렸던 좀녀 삼촌들은 투쟁의 결과가 겨우 호적에 올리는 것뿐이냐며 서운해 했지만 안례가 손사래를 치자 비로소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서로 얼싸절싸 기분 좋게 돌아왔었다.

마을엔 좀녀 삼촌들의 투쟁이 사생아였던 안례네 막내를 호적 있는 아이로 바꿔줬다며 영웅담처럼 잠시 떠돌았지만 금세 조용해졌다.

안례의 셋째 아들은 현 씨 호적에 막내아들로 입적이 되었다. 실제로는 현 씨의 큰 아들보다 한 살 많은 막내아들이었다. 따로 약속한 것이 더는 없었지만 목사는 조용히 안례의 사는 모습을 알아봤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딸 부부는 모르는 일로 하자고 약속하며 안례에게 조금 큰 한 칸 방이 딸린 집을 얻어주었고 매달 아주 약소하나마 양육비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 한 칸 집과 매달 받는 아주 약소한 돈이 평생 안례를 옥죄는 사슬이 될 줄을 그 때는 몰랐었다.


남편을 잃었던 안례가 몸과 마음을 추슬러 겨우 일어나 시작한 일이 미장원 일이었고 그게 꼬투리가 되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험담이 시작되었었다.

처음에는 어린 막례가 물질을 해서 벌어오는 푼돈이 안례의 용돈으로 쓰이는 것에 대한 질시 어린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물질 한 번에 저승입구 한 번이라는 고된 물질에 나서는 어리디 어린 막례의 등골을 빼먹으며 허파에 바람이 들어서 멋이나 부리고 힘이 덜 드는 미장원 일이나 배우려 한다며 좀녀 삼촌들부터 우선 눈을 모로 뜨고 좋아하지 않았었다.

안례가 서청 현 씨와 연애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전에 현 씨에게 버림받았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는 아들을 낳자 험담은 멸시와 조롱으로 바뀌어 갔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들 제 살기에 바빠 점점 잊어가는 듯했다.

좀녀 삼촌들이 나서서 안례의 막내아들이 지 아비의 호적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앞장섰던 것은 안례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막례의 분노와 슬픔을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였다. 어쨌든 그 덕에 비록 남의 집 창고자리였지만 정지간이 딸린 번듯한 집 한 칸이 생긴 데다 생활비도 받는다더라는 소문이 날아다니자 안례에 대한 새롭지도 않은 험담들이 다시금 해무처럼 동부 해안을 따라 위아래로 넘나들었고 해풍처럼 안례가 자랐던 중산간 고모네 마을까지 재빠르게 불어 올라갔다.

현 씨가 혼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결혼한 남자를 꼬드겨 아이를 낳고 그것을 빌미로 집과 생활비를 요구해 호의호식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비틀리고 확대되어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안례의 고막을 찔렀고 초등학교에 줄줄이 다니던 안례의 어린 두 아들들도 학교에서 온갖 놀림을 받는 일이 생겼다.

안례는 멸시 어린 눈빛을 감내하면서 해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해주었고 화장품 방문판매까지 하며 자식들을 먹여 살렸지만 아무리 그녀가 고단하게 일을 다녀도 자식들이 자란 공은 늘 서쪽 어느 교회의 목사에게로 돌아갔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은 현 씨 아들에게 새 신발 하나만 사 신겨도 강 씨 아들들은 홀대한다고 눈을 흘겼고 강 씨 아들들에게 새 옷을 사 입히면 현 씨 아들에게 돌아갈 몫을 강 씨 아들들에게 다 쓴다며 수군거렸다.

고모네에서 자랄 때는 그래도 중산간 심방네 조카딸이라는 고모네 담장 그늘에 숨을 수 있었고 혼인한 뒤로는 시댁 피붙이들이 든든한 병풍이었으며 남편이 죽고 난 뒤에도 사실 집성촌에서는 어린 두 아들들이 안례에게는 담장이 되어주었다. 아무리 낮아도 그녀와 세상의 경계가 되어주는 담.

하지만 아비 없는 막내아들을 낳게 된 뒤로 안례에게는 더 이상 그 어떤 담도, 담장의 그늘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자비한 험담들이 표적을 노리는 살수의 화살처럼 안례와 어리고 비린 아들들에게 쉼 없이 날아와 꽂혔다.


동부 해안은 토양층이 얇고 토양이 있어도 석회질 모래가 날아들어 척박하기 그지없다.

더운 바다에서는 끊임없이 증발한 수증기들이 산으로 오르다 구름이 되어 비를 뿌려댔고 기껏 고생해서 만들어진 토양층은 태풍 한두 번이면 죄다 바위틈 아래로 스며들거나 밀려 내려가서 어지간해서는 발밑에 쌓일 틈이 없었다.

시원한 계절 바다 밑에는 자그락거리는 조개들이 지천이었고 석회질의 홍조단괴나 산호들은 더운 여름이 되면 희부옇게 죽어서 아낌없이 그 껍질을 부서뜨렸다. 파도는 부서진 껍질들을 밀어 올려 한라산 발끝에 하얀 백사장을 만들었고 고운 모래들은 바람을 따라 산의 정강이까지 올라가 쌓이곤 했다.

김녕 토양은 그래서 뽀얗고 척박했다.

중산간에 있는 검고 영양분 풍부한 곶자왈 부엽토는 두께가 얇아 나무들은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해 옆으로 뻗어가는 형편이라 농사가 어려웠고 해안 가까운 곳은 석회토라 무나 마늘이 조금 재배될 뿐이었다.

뽀얀 석회 모래 덕분에 김녕 바다는 고운 파란색으로 하늘보다 맑게 반짝거렸지만 마을에서는 바람만 불면 날아 오는 모래 때문에 빨래조차 널 수 없었다.

해안의 집들은 바람을 피해 길보다 낮은 마당 아래 더 낮게 초석을 다졌고 담장은 지붕 선에 맞춰 쌓아서 모래바람과 거센 해풍이 최대한 집안으로 들이치지 않도록 해야했다.

뭐든 낮고 납작하게 살아야 하는 곳에서는 나무와 풀들도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용암은 한라산 정상에서도 터져 올랐겠지만 삼백 육십 팔 개가 넘는 작은 화구들이 산마루에서부터 해안까지 널리 퍼져 있었고 그중엔 게거품 토하듯 붉은 송이를 뱉어내는 오름과 뜨겁고 검붉은 돌 죽을 해안까지 끈기 있게 흘려보내는 오름도 있었다.

검붉은 용암은 바닷가에 도착하면 물가에서 부풀어 올라 등이 터지며 식었고 주르륵 흘러온 용암반죽은 선창가에 던져진 둥글게 감긴 밧줄더미처럼 주름져 굳기도 했으며 우당탕거리며 바닷물과 싸우다 굳어지고 부서져 크고 작은 현무암 덩어리가 되기도 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구멍 숭숭한 검은 바위들도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에 제 피부를 가루로 만들고 구멍에 감춰두어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뿌리를 내리게 정성을 다했어도 그 살은 너무 얇았고 해안을 때리는 바람과 파도는 겨우 붙어사는 나무와 풀들이 벗겨져 날릴 만큼 언제나 거셌다.

어린 시절 안례는 중산간의 축축한 안개가 언제나 무서웠다. 그러나 소개령 이후 고모네를 따라 내려온 해안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사정없이 부는 바람이 있었다.

짭짤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해안둔덕에는 몇 안 되는 식물들이 있었다.

드센 소나무조차 바람을 이기지 못해 산을 영접하듯 대부분의 가지를 산으로 뻗으며 허리를 굽혀 자라는 판이었다. 바닷물이 넘나드는 곳 가까이엔 갯쥐똥나무가 납작하게 퍼져 자랐고 그 아래로 번행초나 갯까치수영이 버티며 살고 있었다. 그보다 낮은 곳에는 갯방풍, 그보다 더 낮은 곳에는 좁쌀같이 작고 노란 꽃을 피우는 개자리풀이 땅보다 더 낮게 엎드려 있었다. 생긴 건 영락없는 토끼풀인데 잎은 새끼손가락 손톱보다도 작은 개자리풀을 보며 안례는 납작 엎어진 모습이 자신의 신세 같다고 홀로 중얼거리곤 했다.


안례는 성실했지만 늘 앞으로 곧장 나아가지 못하고 휘어지고 끊어지며 굽어 도느라 다잡아 쥐던 근기를 자주 손에서 놓치곤 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후회이자 유일한 낭만이었던 현 씨와의 로맨스가 비참하게 막을 내린 후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세 아들들이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성장하는 모습에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기 일쑤였다.

안례는 그저 자식들 눈앞에 밥상을 차려 하루 두 끼라도 입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가 없이 살았지만 소중하게 만들어낸 밥상머리는 막례가 없으면 늘 울고 싸우는 아이들의 전쟁터로 변했고 무기력하게 그걸 바라보며 그 근원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을 떨치지 못하고 진저리를 치곤했다.

너무 어려 아비를 잃은 아들들은 서로 안례와 막례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다투며 컸다.


늘 어머니의 사랑이 고팠던 아들들은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고 태어난, 아비가 다른 갓난쟁이 동생을 죽을 만큼 싫어했다. 싫은 마음 때문에 가끔은 잠든 아기를 살짝 밟고 지나가거나 입안에 소화도 안 될 것을 넣어주다 들켜 혼이 나기도 했고 혼나고 나면 어머니와 이모의 눈을 피해 더 괴롭히는 악순환이 벌어져 안례의 마음을 작은 전쟁터로 만들곤 했다.

막내가 현 씨 성을 가지게 된 후로 두 형들의 막내 드잡이는 점차 사라졌다. 자신들과 달리 막내에게는 살아있는 아비가 버젓이 있었고 게다가 그 아비는 서청출신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젠가는 목사가 될 거라고 수군거렸다.

자신들과 이모를 짐으로 여겨 도망가 버렸다는 막내의 아버지는 미워하기에는 무서운 존재였고 싫어하기에는 불편한, 착한 사람들만 다닌다는 교회의 예수쟁이였던 것이다.


막내 동생에 대한 아들들의 감정은 어머니나 이모의 사랑을 뺏어간 존재에 대한 막연한 질투나 호적도 없다는 일말의 측은함이 깔린 무시와 구박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두 아들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는 보리밥이 행여 씨 다른 동생으로 인해 생긴 밥인지 궁금해졌고 자신들이 새로 입은 입성이 어머니가 동네 발품을 팔아 머리를 만져주며 번 돈으로 합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두 아들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집을 나가 육지로 가서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들들은 번 돈을 집으로 보내지 않았고 자신들의 자립을 위해 악착같이 절약하고 열심히 저축했다.

여비가 아깝다며 집에도 오지 않던 아들들은 막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제주에 들어와도 할머니 집에서 묵으며 부친의 가묘에 성묘만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아들들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타향의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자신들과 달리 막내가 고등학교에도 진학하고 제법 공부도 한다고 듣자 그걸 어머니의 불공평한 편애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주변 사람들 말대로 자신들조차 씨 다른 동생 덕에 먹고 자랐던 거 아니냐고 치욕스러워하는 걸 안례는 알고 있었다.

안례 자신도 정말 그런 건지 아닌 건지 셈 할 수 없었고 셈도 안 되는 일을 그게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손기술이 좋은 편이어서 그럭저럭 소리 없이 발품 팔며 일했던 안례는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들을 위해 작은 집의 길가 쪽 마당으로 책상 하나 놓고 누우면 맞음직한 한 평 반짜리 방 하나와, 서너 평쯤 되는 점포를 덧들일 수가 있었다.

점포의 벽에는 커다랗고 네모난 상반신 거울 두개를 붙였고 미용실 의자 하나와 중화용 기계 하나, 머리 감을 세면대, 삼 인용 소파 한 개를 빽빽하게 들여놓았다.

안례는 처마 밑에 작지만 하얀 아크릴 간판을 달았다.

간판을 본 셋째 아들은 기겁을 하며 싫어했다. 집을 떠나 독립한 형들과 자신이 어머니에게 어떤 상징이 되어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는지 알고도 남기 때문이었다.

강현미장원.


막례마저 미장원 간판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안례는 이미 집을 나가 독립한 두 아들과, 자신의 곁을 지켜줄 거라 믿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이곳이 어미가 둥지를 틀고 기다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이삼 년에 한 번씩 슬쩍 얼굴만 들이밀고 잠도 안 자고 가버리는 아들들이지만 간판만 봐도 위로가 되지 않겠느냐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얘기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 코 밑이 거뭇해지고 얼굴이 울퉁불퉁해진 막내아들은 소리소리 지르며 난리를 치다 기어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가로로 붙은 하얀 아크릴 간판을 떼어 던지더니 두 발로 작신작신 부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떵 화냥질해서 놓은 아들들이냐. 무사 니가 광질이냐 말이다. 나영 주변 사람들 주뎅이는 하나도 안 무서운데 어떵 내 살 찢고 나온 나 새끼들을 더 무서워하며 살아야 할크냐 말이다.”

안례는 놀랐고 눈물콧물 범벅이 된채 아들을 붙잡으며 소리쳤으나 아들의 눈동자는 이미 돌아가 있었다.

안례는 폭발해 터질 듯한 아들의 검붉어진 얼굴과 실핏줄 터진 안광에 쪼그라드는 자신의 심장은 애써 감추고 발작하는 아들의 다리를 붙잡았지만 깨져서 튀는 아크릴 조각에 얼굴에 생채기만 만들 뿐이었다.

아들의 다리를 붙잡고 말리는 안례의 허리를 막례가 껴안으며 또 말렸다.


셋째 아들이 간판을 다 부셔놓고서 씩씩거리며 뛰쳐나간 후 부서진 간판조각들을 치우며 안례는 말이 없었고 막례만 눈시울을 붉혔지만 소란에 쫓아 나와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은 공연한 짓으로 세상 시끄럽게 만든다고 안례를 손가락질하다 돌아갔다.


이삼일 후에 그래도 학년에서 일이 등을 다투던 학생이 무단결석을 하자 담임이 찾아 나섰고 제주항 인근에서 떠돌며 노숙하던 아들을 찾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사이에 안례는 새로 미장원 간판을 만들어왔는데 세로로 긴 나무 간판에는 그저 미장원이라는 붉은 글씨만 쓰여 있었다.

하지만 시에서 받아온 허가증에는 또렷이 강현미장원이라 쓰여 있었고 미장원에 들르는 사람들이 가게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 없이 손가락으로 허가증을 가리키곤 했다.

손바닥만했어도 집에 미장원이 생겼다는 것은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건 일을 끝내고 나가는 안례의 뒤통수에 대고 들릴지 뻔히 알면서도 “저녁에 소나이들이영 아직도 하영 싸움시냐?”(저집 남자애들은 아직도 그렇게 자꾸 싸운다냐)며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남은 평생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소라 껍데기같이 작은 미장원에 들어앉아 비로소 조용한 삶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강 씨 아들 둘은 일찌감치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아가씨들을 만나 빠른 장가들을 갔다.

아들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육지의 처갓집 동네에서 약소하게 결혼식을 치르거나 예식을 건너뛰었고 안례는 큰아들 결혼식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나가보게 되었다. 하지만 손님처럼 혼주석에 앉아있다 왔을 뿐이었다.

큰 아들은 장가를 들자마자 제 아비의 제사를 가져갔다.

안례는 남편의 제사를 가져가지 말라고 말릴 권리도 없는 것 같아서 그저 눈만 껌뻑껌뻑 뜬 채 아들들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큰 아들이 제사를 가져가자 두 아들 모두 제주에 발길을 끊었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돌아가시자 그제야 작은 집에서 모시는 합제사에 참여하러 오기 시작했다.

막내아들은 머리가 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자 문득 현 씨가 아들을 찾아와 등록금 하라고 돈뭉치를 주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목사가 되어 서귀포 서쪽의 작은 교회에서 사목하고 있었다.

아들은 현 씨가 줬다는 돈뭉치를 안례에게 주며 대학은 제 힘으로 다니겠다며 옷 봇짐을 싸기 시작했다.

안례는 방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느냐고 삐뚤빼뚤 쪽지를 써서 아들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아들의 옷 가방에 돈뭉치를 다시 넣어줬다.

막내아들은 자신을 괴롭히던 두 형이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를 괴롭히는 것은 형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늘 스스로의 혼란 때문에 야기되는 고통이었다.

아들은 아방도 어멍도 제 것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했고 언제나 거칠게 안례를 밀어내기 바빴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사춘기가 찾아와서 그러려니, 사춘기라는 게 길게 갈 수도 있으려니 하며 안례는 묵묵히 제 외로움을 견뎌냈다.

그나마 막내아들이 사범대학에 들어간 것은 타고난 영민함에 본능적으로 길러진 눈치 때문일 것이라고, 개천에서 용 난 것을 보면 지 아방 쪽이 머리가 좋은 거 아니겠느냐고 되는 대로 떠들어대는 주위사람들의 여전한 뒷말에도 안례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담대하고 강인해져서가 아니라 세상에 무심한 듯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막내아들은 지 말대로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방학 때도 방과 후에도 안 해 본 아르바이트 없이 온갖 일을 다 해 학비며 생활비를 벌어 썼다.

아들은 건설 노동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병역이 면제되자 해병대를 가야 하는데 못 갔다며 발버둥치며 분해하기도 했다. 아들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안례는 비로소 온전히 아들의 어미가 되었고 아들도 온전히 어미의 아들이 되어주었다.

몸이 다치니 마음이 노글노글해진 아들은 다시 어린아이라도 된 듯 거친 형들의 눈치 볼 일 없이 어린양도 투정도 마음껏 부릴 수가 있었다. 아들이 아픈 동안 안례는 잠시 인생의 짧은 봄을 누렸다. 현 씨와 연애하던 시절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배도 있고 중산간에 너른 감귤 농장도 있다는 김녕 포구의 부잣집에서 며느리감으로 눈독 들이던 막례를 데려간 뒤로 한동안 제 살림과 아이들을 키우느라 언니까지 살뜰히 살펴줄 수 없어 조금은 애가 닳았던 막례는 조카가 서너 달 가까이 병원에 누워 있던 동안 처음으로 안례에게서 눈을 떼고 살 수 있었다.

안례가 다시 외로움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육지로 발령 난 후부터였다. 졸업하고도 발령이 나지 않던 시절이라 아들은 발령신청을 해두었던 경기도로 나가 학원 강사로 뛰었고 이년쯤 후엔 정식 발령이 났다.

아들은 발령 나고 이삼 년 후엔 거기서 제 어머니처럼 헤어숍에서 일한다는 말 수 적은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인사시키러 데리고 들어왔다. 아들이 육지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에 현 씨가 혼주로 참석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비에게 연락을 한 건 아들이었다. 안례는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혼주석에 현 씨와 나란히 앉았던 그 순간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설레어했다.

아주 짧았던 현 씨와의 인연 중에 가장 엄숙하고 쓸모 있었던 오직 한번뿐인 그 순간 안례는 비로소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바로 따로 움직여 제주로 돌아갔다.


경기도의 작은 시골 학교에서 근무하던 아들은 그곳에서 딸 둘을 낳았다. 큰 딸에게는 미리라는 이름을, 둘째 딸에겐 예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안례는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쯤 아들이 술을 과하게 마시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며느리로부터 듣게 되었다. 며느리는 아이들 어린이집 비용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헤어숍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그걸 반대하였고 술만 마시면, 미장원에 나가고 싶은 진짜 이유가 뭐냐고 물으며 손찌검을 한다고 하소연하였다.

밖에 나가면 한없이 점잖은 교사의 모습이었지만 술에 취해 내 집 울안으로 들어오면 의처증 환자가 되어 아내에게 욕과 손찌검을 하며 살림을 부순다는 것이었다. 어린 미리가 아버지로부터 맞는 제어미를 지키려다 얼굴을 맞아 코피가 터지고 뺨이 붓는 일까지 생겼다고 했다.

며느리에겐 친정어머니가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참고 살다 시어미에게 하소연을 할까 생각하며 안례는 가슴이 아려왔다. 자신의 피붙이들 중에 주사가 심해서 아내를 패거나 욕하는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온 천지에 술 먹고 처자식을 때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제 할 일도 안 하면서 못나게 아내 등골 뽑아먹고 사는 무지렁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안례는 아비 없이 셋째 아들을 낳고 마음병을 앓느라 아이가 젖을 채 떼기도 전에 애먼 막례에게 아이들을 죄다 맡기고 자신은 시로 나가 미장원엘 다닌다고 휘청거리며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며느리가 미장원에 다니고 싶어 하는 건 자신과는 다른 이유겠지만 아들이 무슨 심정으로 자신의 아내를 그리 막 대하는 건지 마치 청소년기에 자신을 홀대하고 무시했던 때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례는 며느리를 달래고 다독이며 자신이 버는 푼돈들을 모아 아들 몰래 며느리에게 보내주곤 하였다.

나가지 말고 집에서 살림하라는 뜻이었다. 명절이고 뭐고 아예 제주에 내려오지 못하게도 했다. 애들 데리고 먼 길 오가는 일이 고생스럽다는 핑계였지만 아들의 행실이 며느리 입을 타고 제주에서 떠도는 소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제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고 조금 사그라진 것 같았던 아들의 주사는 아들이 태어나자 내 핏줄이 맞냐고 의심하며 아기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얼굴이 자신을 닮지 않았다며 젖먹이를 안은 아내를 다시 때리기 시작했다는 하소연이 바다 건너 전화선을 타고 다시 넘나들었다.

소식을 들은 안례는 막막해졌다. 막례에게 조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에 속 앓이가 시작되었지만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를 뿐이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단이 벌어졌다.


큰 손녀딸 미리가 제 어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비를 파출소에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어미가 맞아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신발도 신지 않고 파출소로 쫓아가서 엄마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고 했다. 울먹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들이닥친 경찰들은 주취에 가정폭력 현행범으로 아이의 아비를 데려갔고 그가 꽤 괜찮은 성품으로 알려졌던 교사라는 것이 드러나자 집으로 바로 돌려보냈지만 소문은 곧장 퍼졌고 학교까지 다소 시끄러워졌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경고처분을 받고 마무리되었지만 아들은 제 아내를 괴롭힐 뿐 아니라 제주에 있는 안례에게도 전화를 하며 술주정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술만 마시면 전화해서 큰 딸년이 지 아비를 범죄자처럼 신고해서 이제 낯을 들고 학교에 갈 수가 없다고 부들거렸다. 어머니 안례와 얼굴이 똑 닮은 큰 딸에 대해 악담을 퍼부으며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떠들다 잠들어야 그 끔찍한 통화가 끝나곤 했다.


안례의 삶에서 유일한 자랑거리는 바로 선생 아들이었다. 제 호적에는 없어도 세상 모두가 그 아들이 바로 안례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뿌듯하고 든든했다. 그런 아들이 술주정에 아내와 자식들을 못살게 구는 파락호가 되어가는 상황을 앞에 두고 안례는 답을 찾지 못해 어두워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사는 지역의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들이 아내와 어린 아들을 태우고 어딘가 가다가 깊은 호수 옆 도로에서 가드레일을 부시고 호수로 추락해 모두 심정지 상태에서 건져냈다는 어둡고 축축한 소식이었다.

어린 손녀딸 둘을 아동복지기관에서 돌보고 있으니 와서 사고 뒷수습과 장례도 치러야 하고 아이들도 데려가셔야 한다는 바윗덩어리 같은 말도 덧붙였다.


한라산이 무너져 내린다고 그보다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천 길 바닷물이 넘쳐 덮친다고 해도 그보다 춥지 않을 것 같았다.

안례는 하룻밤을 꼬박 허깨비를 보며 앓아눕다가 막례에게 전화를 했다.

막례 내외가 안례를 부축해 육지에 도착했고 안례의 강씨 아들들이 찾아와 그렇게 미워하던 막내 동생 가족의 장례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도와 수습하였다.


보험사에서는 잦은 주취와 가정폭력 이력을 앞세워 자살로 몰고 가고 싶어 했으나 추락 전 도로에 남겨진 갈지자의 스키드마크 때문에 운전 중 부부싸움 끝에 사고가 난 것이라는 경찰의 사고 판정이 받아들여졌다.

두 부부의 부검을 마치고 치러진 장례에 아들의 아비인 현 씨가 잠시 머물다 갔지만 그는 남겨진 손녀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서둘러 되돌아갔다.


호적에 없는 셋째 아들은 안례에게 다시 호적에 없는 두 손녀딸을 남기고 떠났다.

아이들의 양육권과 친권은 현 씨에게 넘어갔지만 현 씨는 모든 것을 안례에게 일임했다.

아니 막례 내외에게 언니를 부탁한다는 한마디만 남겼을 뿐이었다.

세 살 먹은 예리는 아직도 손가락을 빠는 아이였고 여덟 살이 된 미리는 말과 눈물을 잃은 채 무서워 떨기만 하였다. 안례는 자신을 닮았다던 아들의 말이 떠오르며 미리를 바라보다 온몸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미리가 부모를 모두 잃고 어린 예리와 남겨진 것이 어쩌면 안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빼닮은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동병상련이 아니었다.

술만 취하면 전화 걸어 주절거렸던 아들 말처럼 어린것이 쓸데없는 일을 벌여 제 아비를 낯도 못 들고 살게 해서 이 사달이 났는지도 모른다는 원망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자신을 판박이로 닮은 어린 손녀딸에게로 덮쳤다. 안례는 자신이 손녀딸에게 악담을 퍼붓는 상황조차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놀란 것은 막례였다.

언니가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어린 손녀딸에게 저리 막말을 쏟아내며 원망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제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미리의 손을 붙잡고 온 건 막례 내외였다.

제주로 돌아와서도 안례는 어리고 여린 큰 손녀딸을 영 마음에 품지 못하였다.

제 어미를 죽일 듯이 때리는 아비를 신고했으니 요망진(영리한) 아이려니 했으나 미리는 그렇게 요망진 아이도 아니었다. 마치 가까이하기 싫은 무엇이라도 되는 듯 훠이훠이 두 팔 벌려 쫓아내기 바쁜 할머니 안례 때문에 기가 꺽인 미리는 비 오는 날 버려진 상처 입은 새끼 고양이처럼 숨을 곳도 찾지 못한 채 마당 한가운데서 부들부들 떨고 있기 일쑤였다.

속으로는 메께라? 메께라? 의심하고 반문 하면서도 안례는 그 부들부들 떠는 미리가 자신의 눈에 보일 때마다 저절로 눈에 쌍심지가 켜졌고 욕이 튀어나왔으며 심지어 빗자루를 들어 때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안례는 그런 자신을 변명이라도 하듯 아방, 어멍에 어린 아시까지 잡아먹은 년이라고 원망을 담아 퍼부었다.


더 어린 예리는 그나마 할머니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수가 있었다.

안례는 미리를 밀어내면서 예리는 더 꼭 껴안았다.

미리에게 호되게 하면 할수록 예리는 안례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고 품으로 파고드는 예리 때문에 안례는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주로 돌아온 후 안례는 미장원 간판을 떼어 안에 집어넣고는 다시는 머리 마는 일을 하지 않았다. 미리가 학교에도 못 나가고 버려진 고양이처럼 문 닫은 미장원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막례 내외가 어찌어찌하여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줬지만 안례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

한 번은 어린 미리가 빗자루에 맞은 흔적을 팔뚝에 휘감은 채 김녕 해안도로를 따라 허우적거리며 걷는 것을 버스를 타고 학원을 가던 막례의 막내아들 영천이 보았다. 중학생이던 영천이 차에서 내려 어린 미리를 손 붙잡고 막례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가 안례에게 데려다준 후로 막례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안례에게서 미리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성화는 핑계였고 어떻게든 둘을 떼어놓아야 둘 다 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미리는 이제 막 늙어가기 시작하는 막례의 어리고 안쓰러운 혹이 되었다.


미리는 이모할머니와 막내 삼촌의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숨을 곳만 찾는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성장하였다. 안례는 미리의 교육비며 용돈을 동생에게 보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리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미리와 예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 아버지처럼, 보호자로 이름이 올라있는 현씨 이름을 썼지만 학교로 찾아가야하거나 상담을 위해 통화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모할머니 내외였다.


안례의 장례가 끝나고 막례가 놀랐던 것은 안례가 자신이 살던 집을 예리 앞으로, 해안 쪽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집 한 채를 미리 앞으로 상속한다고 공증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미리와 예리 앞으로는 결혼할 때 보태라고 적은 돈이나마 각각 따로 통장을 만들어두었다. 서랍에는 그 돈들이 막내아들내외가 남긴 유산을 관리하며 푼푼이 모은 것이라는 설명이 쪽지에 남아 있었다.

안례는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쪽지 말미에 남겼다. 쪽지는 써둔 지 오래된 양 한쪽 귀퉁이가 얼룩져 있었지만 혹시라도 버려질까 봐 노란 고무줄에 묶인 통장들의 맨 위에 같이 묶여 있었다.

안례는 자신의 호적에 버젓이 있는 두 아들들에게도 아주 적은 돈을 조합 예금통장에 남겨두었지만 그건 자신의 장례를 치를 때 쓸 비용에 지나지 않았다.

안례의 아들들은 안례의 장례가 끝난 뒤 어머니의 유산 정리에 뒷말을 보태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던 집도, 어머니를 근근이 밥 먹고 살게 해 준 아주 작은 미장원도 결국 현 씨에게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고 자신들도 어머니의 삶에 경제적인 보탬이 되어준 적이 없었기에 그저 자식 도리나 하러 왔을 뿐이라고 아주 조금의 서운함을 눌렀다.

늘그막의 안례가 품에 안고 키우던 예리는 장례식이 끝나고서야 귀국할 수 있었고 안장되기 전 겨우 할머니의 유골함을 만날 수 있었다. 안례의 아들들은 장례식 후 서둘러 안례를 아버지의 가묘에 합장하려 했으나 예리가 돌아와서 할머니 유골함이라도 뵐 수 있게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미리의 부탁에 하루를 더 예리를 기다렸다가 안례의 유골함을 안치하였다.

예리는 할머니 유골함을 안고 이모할머니만큼, 예리의 큰 아버지들만큼 오열하였다. 예리의 오열에 안례의 아들들과 막례는 다시 한 번 목을 놓아 울었다. 그들의 통곡과 오열에 하늘의 구름들이 서둘러 비켜지나갔고 바람과 파도가 잠시 공명을 멈췄다. 공명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안례의 유골함을 감싸고 있던 안례의 피붙이들 안에서 잔잔해졌다.


세상의 분별이 요구하는, 요망지게 자라 남편과 자식을 올바르게 이끌어가며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하는 강인하고 모범이 되는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상과는 다를 수도 있는, 다를 수밖에 없는 그렇게 살아오느라 피눈물 났을, 이렇게 끝난다고 더 이상 어쩌지도 않은.

안례의 삶 그 끝이 다 자취를 감추기도 전에 적어도 피붙이들은 안례의 삶에 더이상 자신들만의 분별의 잣대를 갖다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안례의 아들들은 막례에게 첫제사에는 육지에 한번 오시라고 말했고 그 끝에 예리와 미리에게도 이모할머니 모시고 제사에 참여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제주를 떠났다.

할머니가 떠난 작은 두 칸 집에 미리는 처음으로 두려움 없이 예리와 함께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 작은 집 여기저기에 안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미리는 특별휴가에 그동안 쓰지 않던 연차를 보태어 보름 가까이 제주에 머물다가 육지로 되돌아갔다.

미리가 굳이 소개를 시켜주지는 않았지만 미리의 곁에 한 젊은이가 계속 어른거리며 맴돌았고 미리가 되돌아가는 길에 동행을 하기에 막례는 안심했다.

미리는 이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막례에게는 미리보다는 예리가 눈앞에 있었다.

예리는 여행 전에 이미 자신이 일하던 부산의 작은 극단 일을 정리했었고 앞으로 할머니 집에서 지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막례는 길고 고된 안례와의 이별을 마치고 아들 영천에게 의지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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