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의 시간 epi. 13(예리의 시간)
뜨거운 습기가 공기 중에 가득 차서 손을 허공에 휘휘 내저으면 더운 물방울들이 손끝에 맺힌 다음 손가락을 타고 손목에서 겨드랑이까지 흘러내릴 것 같은 더위다.
추울 땐 다들 후드달린 패딩 점퍼로 온몸과 머리를 동여매고 얼굴만 빼꼼 내놓고라도 신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렇게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엔 신들조차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건지 신당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어진다.
모시기 힘들기는 굿마당도 마찬가지다. 치마며 두루마기를 겹겹이 껴입고 펄펄 뛰어야 하는 굿은 눈밭에서는 가능해도 폭염 아래서는 대신 할머니부터 온갖 장군신, 애기동자신 모두 눈꼬리 치켜뜨고 흘겨보다 시원한 신당 안으로 숨어드실 게 분명하다.
예리는 이럴 때야말로 신당에 휴가공지를 남기고 짧은 여행도 하고 미루어두었던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을 재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맘 먹는다.
미리 앞으로 할머니가 남겨둔 해안 쪽 작은 집을 고치지 않고 그럭저럭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는데 곧 미리가 제주로 내려올 계획이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야 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본인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미장원 딸린 집은 현가 성을 물려받은 예리 몫이 되었지만 정작 집의 주인은 현가와 상관없는, 김가 할머니 핏줄을 타고 예리 몸으로 내려온 신령들이 주인이 되었다.
예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도 안 되어 신내림을 받았다.
사실 예리의 신병은 부산 극단으로 떠날 때쯤부터 나타났다.
‘할망 버리고 도망가는 은혜도 모르는 망할 년’이라며 할머니의 온갖 욕을 다 들었지만 병명도 안 나오는데 죽을 만큼 아픈 온몸의 고통을 할머니 곁에서 고스란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제주에서도, 부산의 작은 극단에서도 연기를 할 때마다 고통이 말할 수 없었지만 춤추는 역할만큼은 신이 나서 할 수 있었고 배역도 끊이지 않았다. 백만 원도 안 되는 극단 수입과 이런저런 단기알바를 통해 무용 교습비와 생활비를 메꿔 가며 살았지만 한 번씩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듯 시리고 아플 때면 숨 쉬는 게 싫어질 만큼 모든 것이 귀찮고 힘들었다.
따듯한 나라로 떠나보면 괜찮을까 싶어 예리가 선택한 곳이 어찌어찌 인연이 닿은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 캔디안 무용단이 부산에 머물며 한 달 가까이 공연을 했고 예리가 보조스텝으로 알바를 뛰었던 인연 이 생긴 때문이었다.
먼 열대의 이국춤을 배운다는 핑계로 인천을 떠나 스리랑카로 향할 때 할머니는 거의 자포자기한 것처럼 축축하고 낮은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내가 너 오기 전에 죽어질 거 닮다. 강 봥, 혼저 오라. 혼저 오라.’ (가서 보고 빨리 와라, 빨리 와라)
처음 갈 때는 두 달만 있을 요량이었다.
월셋집 살림살이 중에 버릴 건 버리고 당근 할 것은 당근 한 뒤 보증금은 할머니 통장으로 보내고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떠났던 길인데 기어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오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중부는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제주 곶자왈 같은 곳이었다.
곶자왈보다 더 습하고 더 검은 숲이 끝이 없이 넓고 높고 깊숙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안개처럼 습기가 가득해서 머리카락이 저절로 축축해지고 대낮에도 울창한 숲 그늘 때문에 사방이 온통 컴컴해서 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가 없는 곳. 발밑으로 어디선가 한줄기 가느다란 한기가 감아 도는 데, 숲 그늘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이 독화살처럼 정수리와 어깨에 사정없이 내려 꽂히는 곳. 흐르다 굳고, 굳다가 부서져 아무렇게나 쌓인 용암바위들 위로 두꺼운 이끼와 부엽토가 평평하게 덮여있지만 그 아래 어느 곳에 작고 거친 함정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숲.
아무 곳이나 발을 디뎠다간 발목이 꺾어지거나 함몰된 굴로 빨려 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으니 함부로 발을 내딛으면 안 된다고 할머니가 신신당부했던 곶자왈 같은 검은 숲이 스리랑카에 어둡고 축축하게 펼쳐져 있었다.
예리는 한국인들이 비교적 많이 방문한다는 불교 성지 도시 캔디에서 네 달 정도 춤을 배웠다.
다리와 코어의 힘을 바탕으로 몸의 균형을 잡고, 손끝으로 내려와 몸을 흐르고 발끝을 타고 온 대지로 퍼지는 하늘의 기운을 표현하는 칸디안 댄스는 춤의 모든 순간 힘의 절제를 요구했는데 한국에서는 거의 신 내린 것 마냥 절정의 춤으로 모든 기운을 다 털어내고 탈진 상태에서 무대를 내려왔던지라 그 절제하는 춤의 힘 덕분인지 몸의 통증을 못 느끼는 시간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예리는 춤 수업을 두 달 더 연장했고 두 번째 두 달 동안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호텔에서 로컬 무용단에 섞여 춤을 출 수 있었다. 관광객들에게는 자국민 무용수가 있다는 것이 더 큰 흥미와 호기심을 줄 수 있었고, 약간의 공연 수당을 받을 수 있어서 꽤 괜찮은 시간들이었다.
관광객처럼 살지만 않는다면 스리랑카는 가난한 채로 지낼 만한 곳이다.
약속했던 넉 달이 모두 지나자 예리는 잠시 흔들렸었다.
무엇보다 몸이 덜 아파 스리랑카에 더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저 오라.’ 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아주 먼 푸른 섬으로부터 한 줄기 실처럼 풀려서 인도의 끝자락에서 인도양을 향해 뚝 떨어지는 눈물같은 스리랑카의 한복판 캔디까지 흘러들어와 예리의 허리춤을 단단히 묶고 끝없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러니 무용 수업이 다 끝났을 때 돌아왔어야 했다.
우기 아닌 우기가 시시때때로 닥치곤 하는 계절이라 요가원이 잠시 휴원에 들어가기 직전, 일주일은 요가를 배우고 휴원한 뒤 일주일은 요가원 관리를 하는 알바를 하자고 권하는 무용단 친구의 권유에 따라 예리는 보름쯤 더 스리랑카에 있을 요량이었다.
디지털 디톡스를 성실히 지키자고 결심했던 터라 휴대폰을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요가수업이 끝날 때쯤 갑자기 할머니가 예리의 꿈에 보였다.
할머니가 어린 예리를 품에 안고 있다가 슬며시 내려놓더니 아무 말 없이 미장원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벌떡 일어나 쫓아가 미장원으로 따라 들어갔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평소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던 바깥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어 서둘러 문을 열고 밖을 보니 할머니가 어느새 올레길 끝에 서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운 얼굴로 웃으며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 사레를 치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꿈이었다. 할머니를 찾으러 가야 하는데 미장원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버둥거리다 깨는 꿈이었다.
예리는 갑자기 불안해졌고 부랴부랴 휴대폰 전원을 켜자 미리와 영천이 삼촌, 부산 큰아버지까지 줄줄이 찍힌 전화번호의 행렬이 기다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걸 못 기다리고... 아님 좀 더 일찍 꿈에 찾아오든지... '
‘꿈이라도 여기까지 오기가 그렇게 멀었나.’
속은 쓰리고 아픈데 할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 대신 꿈속에서라도 더 일찍 찾아오지않았다고 원망하느라 예리는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캔디에는 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정글에 있던 요가원에서 캔디까지 가는 길도, 캔디에서 콜롬보까지 가는 길도,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구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크고 작은 장애가 계속해서 발생했다. 할머니에게 돌아가야 하는 마음은 두 배속인데 몸은 저속영상에 갇혀있는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이 예리에게는 지옥 그 자체였다.
폭설로 모든 것이 멈췄었다는 제주에 가까스로 도착해 안장되기 전 할머니 유골함을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은 부산 큰아버지가 크게 마음 써줘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주로 돌아온 후 예리에게 원인 모를 온 몸의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알음알음 찾아간, 육지에서 왔다는 만신도사는 왜 이제야 왔냐고 실컷 혼을 냈고 그게 신병임을 알려주었다. 신내림 받으라는 신의 메시지라는 거였다.
알 것 같았다.
왜?라는 의문은 생기지 않았다.
올게 온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납득되었다.
예리가 만신에게 찾아가기 전, 오래 전 함께 했던 고향의 극단 동기들과 민속공원의 숙소에서 하루 놀며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한 예리가 한 밤중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줄줄이 풀어 손에 감고 숙소를 뛰쳐나가 그 넓은 억새 들판을 춤을 추며 나아가더니 엄청난 높이의 거석에 꾸역꾸역 기어 올라가 그 위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허연 화장지를 나풀거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리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신고받은 119 에서 사다리 차로 조심조심 끌어내리기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춤을 추었던 예리를 보고 다들 신들리지 않고서야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얼른 무당을 찾아보라고 재촉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지만 예리는 구지 외면했던 몇가지 징조들을 더 이상 스스로 부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를 데려가야 내가 돌아올 것을 알았던 걸까.’
기어이 제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짊어지게 하려는 신령들 힘이었을 것이다.
신내림을 받는다는 것은 신의 힘을 받아 어렵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달래주는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언제나 정결한 마음으로 탐욕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그럼에도 끝없이 찾아오는 심신의 고단함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걸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할머니가 오래오래 살 수 있게 기도 드리면서 가까이 있었을 텐데 그걸 몰라 도망 다녔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미리도 우찬도 조심스럽게 존중해 줬다.
“뭐든 네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 네가 살아갈 시간들은 이제 온전히 너의 시간들이야.”
이모할머니는 공연히 미안해하며 눈물을 흘렸고 큰아버지도 전화기 너머 낮은 소리로 앞으로의 고단함을 미리 안쓰러워해주었다.
할머니 쪽으로 중산간 마을에 심방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습무당 대가 끊겨 칠십 가까운 어르신이 여전히 큰 부채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예리는 이제야 알았다.
하루라도 빨리 내림굿 해 줄 만한 근기 든든한 만신무당을 찾아야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신내림 받아야한다고 처음 얘기해줬던 만신도사는 막상 애기무당 새로 들이는 게 귀찮다고 처음엔 체머리를 흔들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못한 채 젖은 빨래처럼 할머니 집에 널브러져 있던 예리를 어찌어찌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무래도 내가 너 거두지 않으면 너 혼자 이 구석에서 기어이 죽을 것 같아 내가 왔다.”
만신도사와 같이 온 당골이 밖에 나가 레토르트 죽을 사와 뎁혀서 간장과 함께 내놓으며 누워있던 예리를 일으켜앉혔다.
“너 신내림 안 받으면 하나 남은 언니도 죽고 너도 죽어. 날 잡자.”
“너를 내자식 만들라고 니가 찾아왔던 날 제주 오고 싶었나 보다. 올 일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 들썩거리는지. 올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왔었는데.”
만신도사의 말에 예리는 아픈 몸을 일으켜 앉아 엉엉 울었다.
신내림 받는 날은 제주에서 새로 신내림 받는 애기 무당 소문을 듣고 할머니의 먼 친척들이 계시는 중산간 본당의 노당들 뿐 아니라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크고 작은 당골들도 모두 몰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신내림 굿에서 추었던 예리의 춤 선이 어찌나 하늘거리고 애달프던지 빙 둘러서서 보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예리가 작두를 타다 내려와 칼춤을 출 때는 대나무 솟대에 매단 종이꽃들이 죄다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고 내림굿 보던 선배 무당들까지 같이 눈물을 흘리며 예리와 함께 동동거리는 춤을 추는 진풍경이 나타났다.
신내림 영상이 예리의 신아버지가 된 만신도사 유튜브 영상으로 온 나라에 퍼지면서 예리에게 순식간에 '춤추는 애기선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 간절히 기원했다던 신기는 공교롭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렇게 세대를 건너 띄고 예리의 몸을 통해 용천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예리의 신아버지는 할머니 집에 신당을 꾸미라고 했다.
신당은 곧 관광객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대기 중인 사람들을 위해 옆에 작은 카페와 편의점, 식당까지 생기자 오랫동안 터 잡고 살아온 동네 어르신들은 죽은 할머니가 볼 것 없던 마을을 먹여 살린다고 이제 어디 가지 말고 눌러앉으라고 예리에게 신신당부했다.
신당 한 구석, 남들은 모르는 숨겨진 작은 방에 예리는 할머니의 남편 강 씨 할아버지의 신위와 할머니의 신위,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의 신위를 같이 모셨다.
부산 큰아버지는 예리가 할머니와 강 씨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는 걸 허락해 줬다.
할머니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물귀신에게 목숨 줄이 잡혀갔던지라 예리는 그 방을 늘 따듯하게 온기를 유지해 뒀지만 미리는 신당에 오더라도 그 방은 춥다며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살림집은 리모델링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벽과 기둥만 남기고 지붕을 통째로 들어서 층고를 올리고 평수를 넓히는 작업은, 아예 통째로 밀고 새로 집을 짓는 게 훨씬 수월할 뻔했다는 주위의 잔소리를 끊임없이 불러왔지만 미리도 예리도 개의치 않았다.
미리는 사실 예리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놓은 상태였다.
단열, 채광, 방충, 방습, 방취가 완전하면 집은 완벽한 거라고 영천이 삼촌도 맞장구쳐줬다.
미리는 어릴 때부터 이모할머니네 빌라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천정이 낮고 습한 시골집의 불편함을 잘 참지 못했다.
제법 넓은 방 두 칸에 좁은 마루와 개량 주방, 억지로 들인 내부 화장실을 지닌 옛날식 집은 여름엔 뜨거워진 콘크리트 마당과, 좁고 습기 찬 뒷담 아래 우영팟(작은 채소밭)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 덕에 시원한 편이었고 두툼하던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육지에서 들여온 단열재와 개량기와를 덮은 덕분에 겨울에도 제법 따듯했지만 가끔 구멍구멍 찾아 드나드는 지네나 온갖 벌레들이 모처럼 제주에 내려와 쉬는 미리의 목덜미나 종아리를 물어뜯는 불상사를 예방할 수는 없었다.
이번 공사의 중요한 목적 중에는 벌레는 개미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게 포함되어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미리는 육지로 돌아가 여전히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일을 했지만 조만간 그만 둘 계획이었다.
미리는 우찬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아직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박사과정을 끝내고 일 년 예정으로 포닥을 하러 일본으로 나간 우찬이 귀국하면 제주에 정착할 계획이라 미리도 그전에 직장을 정리하고 먼저 내려와서 이런저런 준비를 할 계획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미리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다.
혼자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곧 이 사실은 우찬의 집안에 거대한 축하물결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 우찬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우찬 어머니 장례 기간 내내 미리는 제주로 내려와 장례식장에서 우찬의 곁을 지켰다.
우찬 어머니가 장손 며느리였고 온 집안사람들이 다 모여서 그런지 그렇게 규모가 큰 장례식은 예리로서는 처음이었다.
그 많은 친인척들과 지인들 틈에서 어떻게 미리가 꼬박 삼일을 지냈는지 예리와 영천이 어리둥절할 정도였지만 어쨌든 우찬과 우찬의 아버지가 틈만 나면 미리를 찾는 바람에 오롯이 두 부자에게 집중하며 지내느라 미리도 시간 가는줄 몰랐다고 했다.
우찬의 아버지는 장례식이 끝난 후에 서울을 정신없이 오르내리며 우찬과 미리를 만나러 다녔다.
지금은 우찬이 서울에 없어도 더 바삐 서울을 드나들며 미리를 살펴주고 있었다.
예리가 보기에 우찬 역시 이미 미리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었으므로 미리에게는 아주 따듯하고 포근한 아버지가 둘이나 생긴 셈이었다.
우찬은 사실 예리보다 세 살 어렸지만 예리는 깍듯하게 형부 대접을 했다.
그는 소라 껍데기를 뒤집어쓴 게처럼 숨어 사는 미리를 손심엉(손 붙잡고) 소라 껍데기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귀한 인연이었다.
미리에 대해 더 이상 마음 깊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예리가 엎드려 큰 절을 해도 좋을 귀인인 셈이다.
사실 예리의 성장과정에서 언니 미리는 엄청 복잡한 존재였다.
할머니 말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귀하기 짝이 없는 남동생까지 모두 잡아먹은 세상에 둘도 없는 요물이라고 들었지만 그렇게 나쁜 미리를 이모할머니랑 영천이 삼촌은 왜 데려가서 호강시켜 주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예리는 아주 어릴 땐 한없이 미리를 그리워했지만 조금 커서는 한없이 부러웠고 조금 더 커서는 끝도 없이 미운 존재로 바뀌었었다.
예리를 보고 싶어하며 할머니 몰래 찾아오던 미리는 어린 시절의 예리에게 너무나 그립고 따뜻한 존재였다. 미리는 예리를 만나면 언제나 껴안고는 보고 싶었다며 울었다. 예리가 덩달아 울면 눈물을 닦아주던 미리의 손과 작은 품 안이 예리에게는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했는지.
할머니의 품 안은 언제나 황량했다. 다 꺼져가는 아궁이의 간당간당한 불꽃만큼이 딱, 할머니 품의 온기였다. 부족했던 그 온기는 미리가 몰래몰래 찾아와야만 찔끔찔끔 채워지곤 했었다.
할머니가 미리에게 욕지거리를 하거나 빗자루를 들어 때리면 예리가 그러지 말라고 할머니의 바지자락을 부여잡으며 매달렸었는데 왜 이모할머니는 ‘저라도 살겠다고 할머니 품으로 기어들어갔다’고 오랫동안 말했는지, 커서 그 말을 알아들은 이래로 예리는 오래오래 서글퍼했다.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할머니가 품에 안고 키운 예리보다는 확실히 미리를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예리도 하나 남은 언니 미리마저 순식간에 잃어버린 어린아이였었다.
그게 얼마나 깊은 서러움이었는지 중학교 졸업반 쯤 찾아온 사춘기 삐딱선 탑승과 함께 그 서러움은 꼬이고 비틀어졌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 반항으로 변질되어 상처를 내곤 했지만 정작 그 상처는 언제나 고스란히 예리에게 되돌아오는 걸 감당해야했다.
꾸역꾸역 찾아오던 미리를 내쫓은 할머니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어둑한 미장원의 낡은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눈물을 말린다는 것을 예리가 알게 되었지만 그 모습마저 예리로 하여금 미리를 미워하고 밀어내게 했던 핑계가 되었다.
성마르고 거친 할머니 대신 예리 곁에도 이모할머니나 막내 삼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싹 마른 할머니의 마음과 몸이 예리를 친친 휘감고 있어서 평생 할머니 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예리가 할머니를 떠날 핑계 삼아 통학이 불가능한 산 너머 마을의 미용고에 입학하겠다고 말했다가 처음으로 미리에게나 하던 거친 욕지거리를 듣고 등짝을 맞았었다.
그 후로 예리는 평생 할머니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슬픔 때문에 가끔 심장을 찌르는 잔잔한 통증을 느꼈고 때로는 악몽을 꾸기도 하였다.
예리는 중학교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지만 무용 전공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대신 취업이 잘되는 보건 간호 관련 대학에 들어갔다. 물론 예리에게 학업은 뒷전이었다.
예리가 연극과 춤 동아리 활동에 매진한 덕분에 졸업 후에 시의 동쪽에 있는 작은 극단에 들어가 춤과 연극을 접목한 배역을 맡았고 꽤 인기를 모았지만 그게 돈이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생활도 불규칙한 극단 생활에 대해 예리에게 단 한마디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예리가 할머니를 떠나 부산에 있는 극단으로 옮긴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할머니는 그렇잖아도 쪼글쪼글해진 얼굴을 더 일그러뜨리며 예리에게 온갖 욕을 해대었지만 부산까지 쫓아와 작은 원룸을 얻어주었고 부산에 자리 잡고 살던 강 씨 큰 아들에게 슬그머니 예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예리 아버지와도 할머니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큰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대답을 대신했지만 가끔은 예리를 집으로 불러 밥도 먹여주고 오랫동안 보고 살아온 조카 대하듯 츤츤하게 대해주었다.
예리의 그 시절은 춤을 배우느라 통장이 늘 비어 있었다. 쌀통에 쌀이 떨어질 때쯤 꼭 신발 밑창도 같이 떨어지고 하다못해 샴푸까지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한 번씩 찾아왔고 그럴 때면 어떻게 아는지 할머니가 통장에 몇 십만 원씩 채워주곤 했다.
예리는 언니 미리에게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사춘기 이후로 여러 차례 미리를 사정없이 밀어낸 이후로 미리는 할머니처럼 비쩍 말라갔고 말도 더 없어졌다.
미리가 웃을 때는 이모할머니나 영천이 삼촌이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나마 예리에게만이라도 보이던 미리의 따듯함을 말려버린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 예리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속으로는 오래오래 자책했지만 한번도 미리에게 그 마음을 표현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미리는 간간이 예리가 살아가는 형편을 이리 묻고 저리 챙겼고 미리가 한번씩 보내주는 용돈도 예리에게는 크게 도움되곤 했다.
미리가 쉬지않고 하던 기간제교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미국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영천이 삼촌은 예리를 찾아와 미리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 당시에는 예리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취직한 사무실 안에서 콩이야 팥이야 서로 모를 것 없이 내밀한 관계를 주고받아야 하는 사무직을 두 달 만에 그만두었던 미리는 어쩌다 이수했던 교직과목 덕에 기간제 교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 근무 중 절반 이상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이름도 외우기 힘든 백 명쯤 되는 아이들을 보며 정신없이 수업하고 교무실로 돌아오면 이런저런 업무에 쫓기느라 서로 얼굴 쳐다볼 시간도 없이 지내야 했고 퇴근시간이 되면 다들 박차고 일어나 교문 밖으로 탈출하기 바쁜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기간제 교사는 채용기간이 끝나면 어디든 자리가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는데 미리는 1년 이상의 채용에는 응하지 않았다.
미리가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할머니는 ‘지 아방 피는 못 속인다.’고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오랜만에 얼굴이 환해졌던 것을 예리는 잊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언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한 게 있었다면 바로 그때였을 거라고 예리는 나중에 미리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예리는 미리의 교직 생활을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미리의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은 관계 맺기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미리는 예리를 껴안고 흐느끼며 울다 말하곤 했다.
“미안해. 예리야. 내가 아버지를 신고하지 말 걸 그랬어. 엄마가 피를 흘리다 죽을까 봐 무서웠어. 나랑 너도 죽을까 봐 무서웠어. 신고 안 했으면 사고가 안 날 수도 있는데. 엄마도 아버지도 애기도 안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미리의 그 말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타투처럼 예리의 귓바퀴에 새겨졌고 미리의 눈물은 예리의 작은 정수리를 시시때때로 적셨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미리가 잘 버티던 기간제 교사를 그만둔 것은 입시철 중3 담임 출산휴가 자리를 맡을 때였다. 고입 원서 작성을 하며 주위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한 학생의 원서 접수에 오류가 생겼다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중 조금은 아슬아슬한 합격권의 학교를 우선순위로 써달라고 졸랐던 학생과 학부모에게 일반적인 매뉴얼대로 안전한 곳을 우선 순위로 권유하고 설득했는데 막상 접수할 때는 학생과 학부모가 원했던 높은 커트라인을 가진 곳을 우선 순위로 써냈던 것이다.
명백한 실수였다.
그곳에서 떨어진다면 그다음은 최저 커트라인을 가진 학교만 가능한 상태였다.
천만다행 학생은 그곳에 합격했다. 학부모와 학생은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보냈지만 미리는 그때 잠깐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어떻게든 앞으로 그 일이 그 학생의 삶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뿜어져 나오는 구토를 멈출 수가 없었고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 찾은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 일이야말로 미리에게 푸른 초원이나 다름없는 낙원일 것이라는 걸 예리는 잘 알고 있었다.
비좁은 닫힌 공간에서 근무 시간 내내 미리가 만나는 건 잠시 속도를 늦춘 자동차 창문 밖으로 뻗어 나오는 팔들뿐이고 미리 역시도 그들에게 잠시 팔만 뻗으면 되는 일이었다.
공간은 좁지만 미리에게는 자유롭고 마음 편한 곳일 거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리와 우찬은 일주일 정도 더 제주에 머물렀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찬과 미리는 마치 들판을 날아다니는 한 쌍의 나비처럼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워 보였다.
예리는 할머니의 죽음이 미리를 자유롭게 해 줬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예리 역시 할머니의 죽음 이후 온전히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에 기꺼이 발을 내디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저 모든 흐름이 미리와 예리의 삶에 뭔가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였고 둘 다 그 변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미리는 결혼 후에 우찬의 아버지와 함께 살자고 우찬과 우찬의 아버지를 졸랐다.
우찬의 아버지는 양식장이 있는 해안가에 두 가구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제주도식 새 집을 짓기 시작했다.
미리가 그 집으로 떠나기 전까지 예리에게는 미리와 같이 살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예리와 미리, 그리고 미리 태중의 귀한 아기까지, 예리는 자신들이 함께할 모든 순간들이 신령들의 보호 없이는 안전할 수가 없다 믿으며 틈나는 대로 신령님들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리라 마음 다진다.
씽크대와 붙박이 장 조립이 끝났다고 더위 때문에 창문을 모두 닫고 에어컨을 쐬며 일하던 작업자들이 우르르 현관 문을 열고 나오다 오후의 찌는 더위에 헉! 소리를 내며 다시 들어갈카부댄 하며 더 할 일 없냐고 농을 건넨다.
작업하던 사람들 차가 나가자 곧 영천이 삼촌이 끄는 트럭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선녀님. 저녁은 선흘가서 먹게마시. 우리 할망 모셔가야 핸 들렀다가잰마시."
여름 저녁은 덥고 여전히 낮처럼 밝다.
"무사. 너무 빠른 저녁 아니? 귤칩 작업 안 끝난? 모깃불은?"
"강 고기도 구워먹자게. 박스작업 할망들 빨리 먹여 보내야되마시. 날이 잘도 더워부난 모기들이 힘을 못 써 올 여름은 호꼼 덜 뜯기네. "
"날 더운 덕이 있수다게. 냉장실에 냉막걸리 하영 있을거우다. 몇병 갖고 올까부댄 지두릅서."
영천은 시원한 차 안에서 나가고싶지 않아 그저 '알안. 알안.'을 외친다.
여름 저녁은 노을도 인색하지만 예리는 손끝부터 심장까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처럼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할머니가 떠나시고 몇년 이래저래 힘들었던 시간들이 언제였나싶게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예리는 영천이 삼촌과 이모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심장이 간질거릴 정도로 좋았다.
조카선녀가 요즘따라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걸 자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영천의 코끝과 마음이 조금 시큰해진다.
영천은 공연히 조수석을 수건으로 한번 쓰윽쓱 닦아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