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품 <열심히>
<꾸준히>의 기준.
“내가 꾸준히 해봤는데 안 되더라”
‘꾸준히’라 함은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은 ‘꾸준히’가 너무 쉽게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꾸준한 행동’을 대하는 태도의 진정성이나 깊이보다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결과나 시도한 횟수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너무 쉽게 꾸준함이라고 칭해지는 걸 보면 노력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싶어서 한편으로는 아쉽다. 간절함이나 깊이가 없어서 씁쓸하기도 하다. 어떻게 감히 노력의 정도를 판단하겠냐고 하지만 간절함의 깊이나 진정성은 드러나게 돼있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꾸준함의 기준은 단순히 숫자로 치환하기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정성이나 깊이, 간절함이 꾸준함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억지로, 의지로 하는 꾸준함이 아니라 알아서 저절로 꾸준히 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하고 그만큼 진심이기에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이 그대로 박힌 것이다.
그럼에도 수치로 따져보자면 하루 이틀 하다 말고 3~4달, 반년 정도 해보고 그만둔다면 꾸준히 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최소 2년, 하루에 한 번 내지는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관련된 행동을 해봐야 ‘꾸준히 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양과 질도 따져봐야 할 것이며 꾸준함이 실제로 성장이나 변화를 이끌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끝까지 해봐야 알 수 있다. 최선이었으나 달성하지 못한다면 내 능력 밖의 일이므로 내 그릇은 거기까지다. 꾸준히 해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간절함의 정도가 없거나 노력해도 안 되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 된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절실하다면 스스로 ‘꾸준히 해도 안 돼’라는 말보다 외려 ‘될 때까지 한다’,‘되게끔 만든다’라는 오기가 생겨야 맞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미 자신이 꾸준히 했음을 알기에 그 길은 내 길이 아닌 것을 받아들인다. 스스로 “나 꾸준히 했다”라며 다독이는 일은 인정받고 싶은 내면이나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자기 합리화가 된다.
그렇게 꾸준히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오로지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목표 의식을 갖추고 끝까지 부딪혀 보는 것이다. 될 때까지 하던가, 되게끔 만들던가, 속도를 좇지 않고 방향을 좇던가. 그게 꾸준히고 열심히다. 결국 꾸준과 열심 그리고 합리화는 한 끗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