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차 집사의 육아반성기 - #고양희씨 (2003~2017)
사람들은 7살 어린이에게 종종 물어봅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이런 걸 아이에게 물어볼 수 있느냐고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전자는 아이의 입장에서 더 좋은 부모가 있을 수 있으니 (거의 대부분 엄마이긴 하지요...) 그걸 물어본 걸 테지만, 후자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둘 중 한 명을 고르도록,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요. 엄빠는 동등하게 좋아해야 하는 대상이라고요.
저에게도 사람들이 비슷하게 물었습니다. '나오짱이랑 페코 중에 누가 더 좋아?' '둘 중 하나만 키운다면 누굴 키울 거야?' 저는 고민 없이 나오짱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집사력이 높아진다는 것
운이 좋게도, 일을 하면서 고양이사료 브랜드를 클라이언트로 맡은 적이 있다. 광고홍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여러 분야에 발을 담그곤 한다. 단순히 여자라고 화장품을 받았고, 여름이니 모기 살충제 일이 왔고, 술알못인데도 술을 주기도, 쪼렙 수준의 겜실력인데도 MMORPG 게임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내 것 같지 않았던 클라이언트의 일을 소처럼 하다보니 오는 하늘의 축복인가 싶은 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고양이사료 성분의 좋고 나쁨을 떠나 마지막까지 내 고양이가 가장 맛있게 먹은 식사라 큰 의미를 담고 있어요.)
개와 유사한(?) 생명체로 분류되어 고양이 전문 수의사가 없었던 시절이었고, 고양이 커뮤니티들 속에서 누군가가 해외에서 가져왔다는 출처 불분명한 카더라 번역 자료들을 읽었으며, '나 보다 먼저 키웠으니 저 사람 말이 맞겠지' 라며 고수회원님들의 댓글들을 양분 삼아 고양이를 키우던 시절을 보냈다.
지나고 보니 고양이 전문 수의사가 있고, 그분들을 만나게 되고, 강연도 듣게 되었다. 고양이 전문 미디어와 서적들 속에서 정보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들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있었다.
(집사력이 그 누구보다 높은)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나오짱과 페코를 행복하게 해 줬을 텐데......라는 후회를 여전히 한다.
솔직히 나오짱과 페코는 AND 보다는 OR로 살 때가 더 행복해 보였다. 말 그대로 '또는'의 삶은 내가 나오짱을 맡거나, 페코를 맡았다는 얘기다. 나오짱과 페코를 함께 키우면서 캣타워도, 화장실도 분리해주고,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줬다면 둘은 사이좋았을까? 그때 둘의 불안했던 감정은 단순한 서열싸움이었을까? 아니면 나오짱을 편애했던 내 행동에 대한 페코의 돌발행동이었을까? 늘 다시 묻고 미안해한다.
만우절 장난같았던 결정
나는 나오짱을 심하게 공격하고 집사를 물었던 페코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페코의 성향을 진솔하게 말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보호자를 찾았다. 다행히 좋은 분과 묘연을 잇게 되었지만 그 집에서 페코의 문제행동은 계속되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피부병으로 여러 병원을 다녔다고 전해 들었다. 이 행동은 잦아지는 듯했으나, 새 보호자가 페코 동생으로 아기고양이를 입양했을 때 극대화되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에게 파양 의사를 보여서 다시 페코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엄마, 페코 다시 데려와야겠다. 두 마리 같이 있으면 싸우니까, 둘 중 한 마리를 부산에 보내야겠는데 어쩌지"
"그럼 엄마로 보내라"
부모님이 좀 더 순한 나오짱을 맡기로 하면서 부산에 내려 갔다. 며칠 지내다가 같이 올라오는 길이 아니라,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나 혼자 돌아서는 그 길은 마치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하는 날 같으며, 아이가 나 없이 문화센터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날과 마음이 비슷하다.
나 없이 못 살 것 같았던 나의 첫 고양이는 부산 집에서 친정아빠 딸(?) 노릇을 톡톡이 하며 지내게 되었다. 주로 아빠가 나오짱의 식사와 대화 상대를 맡았고, 엄마는 손발톱 관리과 목욕 등 미모냥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오짱이 부산냥이로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 페코가 돌아왔다. 익숙했던 집에 나오짱 없이 집사 언니의 온전한 외동묘라는 상황을 인식하고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불쌍하고 짠한 마음으로 내가 전한 사랑 속에 페코는 애정표현으로 보답해줬다.
그것도 잠시 당시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페코가 새로운 집에서 적응을 잘할까 걱정이 시작되었다. 우려처럼 낯선 환경과 냄새 속에서 문제행동들을 많이 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잘 맞춰가고 있었다.
새집에서 1년 정도 살았나? 친정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오짱을 여기로 보내겠다고.
"나오짱이랑 페코를 같이 키워보자"라고 신랑이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