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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Aug 01. 2019

이제 상상 속에 뭐가 더 남아 있나요

두 이야기와 영화 <라빠르망>

- 4주 전 - 


선생님,

그녀가 좋아요.

늘 마음을 다치지만 다시 사랑을 찾아 헤매잖아요.

배울 게 많은 것 같아요.


좋네요.

배울 게 많다는 건 좋은 거예요.

4주 후 뵙죠.


 - 4주 후-


선생님,

그녀가 미워요.

남 마음을 다치게 하곤 늘 어디론가 도망치잖아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지난번이랑 말이 다르지 않나요?


한쪽 마음만 생각했던 거예요.

나는 혹시나 그이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그 걱정이 결코 사랑은 아니었던 거예요.

그이 마음만 생각하다가 이젠 내 마음이 다쳤어요.


그녀는 다시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죠. 또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도망치고 있겠죠.


그녀도 마음을 다쳤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쪽이 다친 것처럼요.

상대방을 늘 다치게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녀도 역시 다치고 있진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배울 점이라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요?


선생님, 

저는 지금 도망친 걸 얘기하고 있잖아요.

사랑을 찾아 헤매기 전에

도망침이 선행됐다면 얘기가 다르죠.


그이가 늘 도망쳤다면, 당신이 그걸 몰랐다면

당신은 그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했고

결과적으론 그이도 당신도 마음을 다쳤네요.

쌍방과실입니다.


선생님

조금 이해가 안 되네요.

사랑은 항상 쌍방과실인가요?


여기 오는 사람들 사례는 대개 그렇죠.


난 도망치지 않았는 걸요.


그이가 먼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선생님은 내 편이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마음을 다친 사람의 편입니다.

그니까 양쪽의 편이죠.


갈래요.


도망치는 건가요?


선생님은 마음을 다쳐본 적이 있긴 하나요?


마음을 다쳐본 적도 있고

도망쳐 본 적도 있어요.

도망쳐 온 곳이 여기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게 된 곳도 여기죠.

도망친 사람이 찾아와서는

늘 다시 도망치거든요.

난 더 이상 도망칠 새가 없죠.

늘 그들이 먼저 도망치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전 많은 걸 배웠네요.


많은 걸 배웠나요?


쉽게 사랑을 말하지 말 것,

빠른 판단을 내리지 말 것,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 것,

누군가는 도망쳐야 쌍방과실이 종결된다는 것.

늘 저는 아픈 데서 배움을 얻네요.


많은 걸 배웠네요.

그럼 당신은 당신이 4주 전에 했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 증명한 거예요. 책임을 진 거예요.

당신은 그이를 좋아했고,

그이는 늘 마음을 다치지만 어디선가 다시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고,

결국 당신은 배울 점을 배웠으니까.


허허.

그렇게 말씀하니 또 그렇네요.


마음이 정리가 좀 됐나요?


선생님,

선생님은 이렇게 매일같이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안타깝고, 슬프고, 그러나요?


아니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다쳐야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을 테니까.

나는 이제 도망칠 곳이 없거든요.


듣고 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상담의>


여름 내내 끙끙 앓고 씨름하던 글 한 편을 이제야 마쳤다.

결국 이번 여름의 반을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완전히 열중하지 못했구나, 싶은 생각에 문득 슬펐다.


두 번째 이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고, 불행히도 그리 아프지 않았다.

아픈 말도 최대한 꺼내지 않으려 했다.

오해는 풀되, 끝내는 무해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나는 성숙해진 걸까, 되묻는 순간엔 조금 아팠다.


한 커플이 맥주와 치킨 앞에 나를 앉혀두고 연애상담을 했다.

연애상담이라면 2년 전에 진작 그만뒀어요,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오늘은 왠지 그 무의미를 축하하고 싶었다. 고민 주제는 상상 속의 연인과 싸우는 나의 연인.

연인을 너무 사랑해버린 나머지, 머릿속이 만들어 낸 연인의 허상이 자꾸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였다. 실재하는 연인은 방에서 곤히 잠들어있을 뿐인데,

상상 속의 연인은 온갖 금기를 저지르고 다니는 어느새 방탕한 무법자가 되어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상상 속의 연인과 끊임없이 싸우느라 피폐해져 있고,

어느 순간엔 실재의 연인과 상상의 연인이 겹쳐 보여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본인이 아닌 것들과 싸우는 그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했다.


난제였다.

실재하는 연인은 상상 속의 연인이란 사랑과 집착이 혼합해낸 그의 허상일 뿐이기에 자신이 어찌할 도리를 못 찾겠다고 토로했고, 그는 상상 속의 연인이 탄생하게 된 원인 제공은 결국 실재하는 연인에서 기인한 재료라고 했다. 듣다 보니 맥주잔의 바닥이 슬슬 보였기에, 두 사람끼리 솔직하게 싸우다 보면 그 지지부진한 싸움에 상상 속의 연인이 질려서 도망가버릴 거라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는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난제였다.


사랑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것, 이 문제는 현대 의학의 발달 덕분에 특정 호르몬의 분비와 신경 전달 물질의 영향으로 사람의 감정이 조종된다고 일단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부가적인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걱정과 집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너무도 사랑해버린 마음이라기엔 폭력적이고, 불신이 만든 허상이라기엔 진심의 사려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연인에 대한 걱정이 상상 속의 방탕한 연인을 탄생시켰고, 이는 상상 속의 연인이 어느 순간 실재하는 연인을 삼켜버릴 거라는 집착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만' 부른다면 당신은 용인할 수 있겠는가.


며칠 후 그 커플의 이별 소식이 전해왔다. 그에게 상상 속의 연인은 너무나 거대해져서 그의 뇌와 마음을 집어삼켜버렸고, 끝내 텅 빈 상태가 되어 버린 그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내 그녀를 잡아먹으려 했다고 들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그런 와중에 그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고 했다.

'오, 사랑하는 나의 허상!'


생각해보니 그이도 도망쳤다.

내 상상 속에선, 비록 조금 다른 것들이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내 과거에서 기인한 것들이었다.


내 과거의 습지엔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우글대는 기억들이 있다.

그 습지에는 원치 않는 상사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신을 잃고선 테이블 아래에 기절해 있던 이를 파헤친 토사물에서 구해내 등에 업고 응급실로 달려간 기억이 있고, 술잔을 부딪히며 멀쩡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뜨거운 난로를 향해 마치 마네킹처럼 쓰러져 텅 빈 눈으로 구급차를 탄 기억이 있고, 새벽 네 시 다급한 전화를 받고선 내가 있지도 않았던 술자리의 피해자와 실종자를 위해 경찰차를 탄 기억도 있으며, 하루 동안 연락이 두절된 이에 대한 쎄한 동물적 육감으로 연 현관문을 통해 의도치 않게 자욱한 연탄가스를 한 아름 마셔본 적도 있다.


이 기억들이 내 상상을 키워냈고, 난 그것들과 평생을 같이 산다.

동거하는 그것들에게서 나는 도망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도망친 건 그이였다.

점철된 오해로 그이는 이미 어떤 말도 들을 것 같지 않았지만

꽉 막힌 귀에 대고도 해가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도망친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주길 바랐다.

오해의 불순물이 가라앉고 맑게 뜬 물처럼 무해한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


신비스럽지만 곧잘 진실한 속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이에게도 과거의 습지에 우글대는 기억이 있을 테니 굳이 꺼내려 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것이 패착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이가 진실처럼 이야기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은 꽤 합리적이었다.

'너무 진실되어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것은 위험하다.'

그이는 끝까지 떳떳하지 못했고 끝까지 거짓말을 했고

저 끝까지 도망쳤다.


어차피 그이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곧바로 내가 도망쳤겠지만

나는 잘못과 오해를 버려두고 혼자서만 도망치는 그런 비겁한 도망자는 절대 되지 않았을 거다.

 

상상이 한 사람을 망치고 도'망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

상상을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담 상상은 예술을 향할 수밖에.


아, 이 이야기들 모두 다 제 상상 속 이야기인 거 다들 알고 계시죠?


<상상 속에서>


Dwa serduszka cztery oczy

Ojojoj

Co płakały we dnie w nocy

Ojojoj

Czarne oczka co płaczecie

Że się spotkać nie możecie

Że się spotkać nie możecie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이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흘리네

검은 눈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네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으니까


Kiedy chłopak hoży miły

Ojojoj

I któż by miał tyle siły

Ojojoj

Kamienne by serce było

Żeby chłopca nie lubiło

Żeby chłopca nie lubiło


그 남자가 잘생기고 매력적일 때에

그 누구에게 그를 거절할 힘이 있을런지

심장이 돌처럼 차가워야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지


Mnie matula zakazała

Ojojoj

Żebym chłopca nie kochała

Ojojoj

A ja chłopca chaps za szyję

Będę kochać póki żyję

Będę kochać póki żyję


어머니가 나에게 금하셨네

이 남자를 사랑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난 그 이에게 매달려 있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할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할 거야


'Dwa Serduszka(두 개의 심장)'/ Joanna Kulig & Marcin Mase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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