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관계에서 나로 남는가

by 김나현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관계에 능숙해지기를 요구받는다. 어디서든 잘 어울릴 것, 분위기를 흐리지 않을 것, 적당히 웃고 적당히 공감할 것. 이런 능력은 사회에서 분명 유용하다. 그러나 이 유용함이 언제나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우리는 종종 더 외로워진다. 관계의 수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채워지기보다는 소진되는 이유는, 모든 관계가 같은 깊이를 가질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애써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관계는 본래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택을 스스로의 성향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해왔다. 인맥이 많아야 안정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관계를 정리하면 차가운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맞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 정도 불편함은 다들 참는다”고. 그러나 마음은 알고 있다. 어떤 관계는 노력할수록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버틸수록 나를 닳게 만든다는 것을.


깊고 좁은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실을 일찍 체감한다. 이들은 관계에서 ‘함께 있음’보다 ‘어떻 게 함께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대화의 양보다 질에 민감하고, 잦은 만남보다 정직한 이해를 원한다. 그래서 관계가 많아질수록 풍요로워지기보다는 복잡해지고, 감정이 분산될수록 자신이 흐려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에게 깊은 관계는 사치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환경이다.


깊은 관계의 가장 큰 장점은 설명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기분이 왜 그런지, 왜 혼자 있고 싶은지, 왜 그 말에 상처받았는지를 매번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도 머물 수 있고, 침묵이 오해로 번지지 않는다. 관계 안에서 ‘잘 이해받는 사람’이 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자유다. 이 자유는 관계를 편안하게 만들고, 나를 나답게 유지시킨다. 그러나 깊은 관계는 동시에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상대의 말과 태도에 자연스럽게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사소한 변화에도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기대가 깊은 만큼 실망도 크다. 관계의 폭이 좁아질수록 한 사람의 부재가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커진다. 그래서 깊은 관계는 성숙하지 않은 시기에는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이 관계가 나를 살리는지, 아니면 붙잡고 있는지를 구분하지 못할 때, 친밀함은 쉽게 집착으로 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해답이 넓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관계를 얕게 유지한다고 해서 감정이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얕은 관계는 상처를 덜 주는 대신, 위로도 덜 준다. 많은 사람 속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고립은, 한두 번의 실망보다 더 오래 남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계의 깊이가 아니라, 나의 성향과 관계의 방식이 서로 맞는가이다.


모든 관계는 깊어야 할 필요가 없다. 어떤 관계는 가볍게 웃고 흘려보내도 충분하고, 어떤 관계는 인생의 질문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 경계를 자주 혼동한다는 점이다. 깊어질 수 없는 관계에 깊이를 요구하고, 깊은 관계에는 과도한 역할을 기대한다. 이 불균형이 관계를 지치게 만든다.


관계를 유지할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보통 상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나 자신을 향해야 한다. 이 관계에서 나는 점점 더 나를 이해하게 되는가, 아니면 계속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가.
이 관계는 나를 성장시키는 불편함인가, 나를 소모시키는 고통인가. 이 질문에 솔직해질수록, 관계에 대한 결정은 잔인함이 아니라 책임이 된다.


성숙한 관계란 환상이 제거된 관계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왜곡하지 않아도 되는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 깊고 좁은 관계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숨지 않아도 되는 관계.


결국 관계란 나를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라, 나를 쉬게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과 잘 지내는 능력보다, 단 한 사람 앞에서라도 편집되지 않은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관계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워야 할 태도다. 그리고 이 용기를 갖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관계의 수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게 된다. 관계는 많아서 삶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맞아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이 단순한 진실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알게 되면 인간관계는 훨씬 덜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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