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괜히 짜증이 나는 순간을. 말투 하나에 마음이 상하고, 별일도 아닌 일에 예민해지는 날을. 예전에는 웃고 넘겼을 일인데, 이제는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그 사람은 여전히 곁에 있는데, 관계의 온도는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처음보다 말은 짧아졌고, 반응은 빨라졌으며, 기다림은 사라졌다.
이상한 일은, 사랑이 식은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태도만 달라졌다. 당연하다는 말이 늘어났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신중함을 내려놓았다. 편안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점점 조심하지 않게 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다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장 무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사랑했고,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 속에서 서서히 무뎌졌다. 친구든 가족이든 연인이든,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관계는 드물다.
사람은 왜 사랑할수록 무심해질까. 그 이유는 대부분 감정의 부족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과신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묻지 않게 되고, 확인하지 않게 된다. 뇌는 반복되는 자극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처음에는 특별했던 말과 행동이 시간이 지나면 평범해지고, 여전히 소중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를 배경처럼 처리한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성이 자동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관계일수록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더 자주 확인하고, 더 천천히 말하고,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편안함이라는 이유로 무례해지지 않기 위해,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다. 진짜 다정함은 처음의 설렘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아 있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진짜 예의는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향해야 한다.
이런 다정함은 내가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시간이 흐른 뒤, ‘그땐 왜 그렇게 쉽게 대했을까’라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낭만이 체질이고, 다정함이 습관인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할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거리를 둔다는 건 차갑게 물러나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더 세심하게 다루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말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침묵에도 함부로 의미를 덧붙이지 않는 태도.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하지 않고, 설명보다 듣기를 선택하는 일. 질문을 던지기보다 여백을 남겨두는 용기. 이런 사소한 선택들이 관계에 건강한 경계를 만든다. 그 경계가 있을 때, 우리는 더 오래 존중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믿음은 종종 관계를 게으르게 만든다. 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낫다. 관계는 친밀함보다 리듬에 가깝고, 애정보다 타이밍에 더 민감하다. 때로는 다가가는 것보다 제자리를 지켜주는 인내가 더 깊은 사랑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가까워지려 애썼고, 상대에게 숨 쉴 틈을 남겨두는 방식의 사랑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일, 마음을 풀어헤치기보다 여미는 태도. 좋은 거리는 계산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는 감각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다가갈수록 더 섬세해지고, 함께할수록 더 조심스러워지는 관계만이 오래 남는다.
사랑은 결국, 내가 가장 무심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 끝까지 무심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