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느슨하게

by 김나현

손바닥에 식은 휴대폰을 들어 올린다. 검은 화면 속 내 얼굴이 잠깐 비쳤다가, 알림 하나 없는 빛만 번진다. 별일 아닌데, 마음은 이미 두 번의 기대와 두 번의 낙차를 겪었다. 혹시 너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 있을까. 알림이 올 것만 같은 순간, 짧은 설렘이 금세 허탈로 뒤집힌다. 아무 일도 없는데 마음이 이렇게 출렁이는 게, 나는 아직도 신기하다.


오래전, 인간은 내일을 미리 짐작하며 살아야 했다. 비가 올지, 발소리가 바람인지 짐승인지, 모든 걸 미리 그려야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뇌는 예측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도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 그다음 장면을 자동으로 떠올린다. 그런데 그 그림이 어긋나는 순간, 마음은 작은 흔들림에도 크게 출렁인다.


짧은 침묵이 긴 침묵처럼 느껴지고, 단순한 일정 변경이 일부러 거리를 둔 것처럼 다가온다. 바람 소리마저 차갑게 스치고, 아무 말 없는 화면 속 공백이 내 마음의 결핍을 비춘다. 뇌는 단순한 변화를 ‘거절’이라고 꾸며내고, 나는 그 안에서 혼자 서운해진다. 모든 감정이 진실은 아니고, 모든 진실이 감정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그 이야기에 충실하게 반응한다.


조금 알게 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나만 유난히 민감한 게 아니라, 누구나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는 걸.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앞서 달린다. 그래서 나는 요즘 ‘기대하지 말자’ 대신, ‘예상은 하되, 마음은 느슨하게’ 해보려 한다.


먼저, 알아차린다. 마음이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느낄 때, 속도가 느려진다. 휴대폰을 또 켰다면, 잠시 멈추어 “아, 벌써 내 마음이 앞서갔구나” 하고 생각한다.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다음은 말투를 조금 바꾼다. 같은 상황이어도, 어떤 말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마음의 온도가 달라진다. “싫어진 걸까” 대신 “난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 “망했다” 대신 “오히려 좋은 방법이 있지않을까”처럼. 말의 톤이 바뀌면 마음의 톤도 조금 달라진다.


그리고 기준을 바꾼다. 결과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하루를 채운다. 20분 걷기, 책 몇 쪽 읽기처럼. 그럼 마음은 조금 부드럽게 흘러간다.


살다 보면 계획은 어김없이 틀어진다. 틀어짐이 나쁜 건 아니고, 예상과 다른 길이 때로는 선물이 된다. 문제는 그 길을 마주하기 전에 이미 실망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기대가 실망으로 굳기 전에, 한 번 숨을 고르고 의미를 새로 붙인다.


오늘도 화면을 켠다. 알림 대신 비치는 내 얼굴을 본다. 오늘의 해석도 결국 내 마음이 비춘 빛이다. 연락이 늦으면 “오늘은 피곤했구나”라고, 계획이 바뀌면 “이 길도 길이구나”라고. 마음은 여전히 움직이고, 나는 조금 덜 조이고, 조금 더 숨 쉬며 그 움직임을 바라본다.


생존을 위해 발달한 예측의 기술이, 이제는 삶을 부드럽게 하는 기술이 된다. 그렇게 오늘을 조금 더 살아본다. 나는 이제 조금 멈춰 서서, 마음을 흘려보내기로 한다. 기대는 느슨하게 두고,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도록. 마음이 흔들려도 서두르지 않고, 그저 오늘의 나를 살짝 내려놓는 일. 이런 작은 연습이,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나를 지켜주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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