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햇볕 Oct 18. 2024

실컷 맞고 돌아온 정신




퇴직 후 사설 상담센터 운영을 시작할 때 불안하고 두려웠다. 

잘 운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월급쟁이 상담사에서 개인사업자 상담사가 되는 것은 떨리는 일이었다. 

군에서 받았던 월급에 공간 임대료를 더한 만큼은 벌고 싶었다. 

그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가 등을 떠밀어서 나온 것도 아닌데 억울했다. 

상담센터 운영이 안 되어 더 억울해질까 봐 두렵고 불안했다. 

스스로 퇴사했지만 쫓겨난 기분이 들어서 억울했던 것 같다.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사건은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어쩌면 퇴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군에서 열심히 상담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겉돌았다. 

데코레이션 같은 역할에 신물이 났다. 

물론 극히 개인적 경험이다. 

군상담에 만족하는 상담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갈수록 붕 뜨는 것 같았다. 

안간힘을 써서 군에 애착을 가지려고 했다. 

열심히 상담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건이 있었던 날도 오전, 오후 상담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 

오전 상담을 끝낸 뒤 위기 상황이 발생해 출장 상담을 가야 했다. 

오후에 상담 예정이었던 병사내담자들에게 간부를 통해 위기 상담으로 일정 변경이 되었음을 알렸다. 

다음날 출근을 했는데 전 날 상담을 받지 못한 병사가 상담실 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내가 사용했던 군 상담실은 도서관과 붙어 있어서 도서관을 통과해야 상담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병사들이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을 때는 조용하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상담실로 들어왔다. 

상담실 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던 병사는 내가 다른 상담을 할 때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도서관에 앉아 있던 병사가 상담 시간이 되자 바로 들어왔다. 

병사가 상담실로 들어와서 내 생명을 위협하는 언행을 했다. 

내가 도움을 청하려고 상담실 밖으로 나가려 하니 병사가 문을 막았다. 

대치를 하게 된 상황에서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어차피 도움도 청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왜 이렇게 하는지 얘기나 들어보자 싶었다. 



상담 테이블에 병사내담자와 앉았다. 

병사내담자는 상담에 적극적이었다. 

상담을 받고 난 뒤부터 전역 후 상담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병사내담자가 나를 상담사로서, 인간으로서 멘토로 여겼다.

병사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낮아서 나를 신뢰하면서도 “완전한 신뢰”에 확신이 없어서 불안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려고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내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전문가 태도를 유지하는, 즉 감정 폭발을 하지 않는다면 상담사인 나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병사내담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황당했다. 

인간 세계에서 “완전한 신뢰”가 가능한가?

존재하지도 않은 완전한 신뢰를 위해 생명을 위협하는 언행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나는 병사의 위협적인 언행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신뢰는 깨져버렸다. 



믿음이란 완전한 상태, 즉 결함이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교회나 절, 성당 등 기타 종교 회랑에 가면 없던 믿음도 생긴다.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인데 그럼 그것이 믿음인가?

믿음은 믿을 수 없을 때 생긴다. 

혼란스럽고 의심이 드는 가운데 믿고자 하는 마음, 믿고 싶은 마음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애쓰는 것이 믿음이다.

공감도 비슷하다. 

상담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화, 공감, 경청이란 단어도 많이 들린다. 

공감은 상대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부모도 연인도 부부도 누구도 안 된다. 

예전 드라마에 “관심법”을 사용한다는 주인공이 있었다. 

현재도 관심법이란 말은 우스개로 사용된다. 

나는 공감을 상상력이라고 설명한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공감이다. 

쌤쌤의 상태가 아니다. 

하늘 아래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비슷하게 보여도 다르다. 

그렇기에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며 애쓰는 것이다.      



병사내담자는 과거 상처로 사람 자체에 신뢰가 낮았다. 

상담사를 완전히 믿고 싶어 상담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나는 상담에서 병사내담자의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절실함에 대해서. 

상담 시간이 끝나서 내담자가 나가자 그제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슴이 뛰고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웠던 큰 이유는 간부가 알고서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 때문이다. 

병사내담자가 상담사에게 할 행동을 상담 참여 전 간부에게 말했다고 했다. 

간부는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걸까?

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은 간부가 대뜸 말했다.  

    

“상담관님, 당했나요?”     


이 말을 듣자마자 병사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부는 마치 게임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흥분된 목소리다.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믿기지 않고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은 상황이다. 

미리 알려주지 못한, 또는 않은 이유를 물었지만 간부는 얼버무렸다. 

내가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간부는 걱정 따위 없었다. 

간부 자신의 기대가 성공했음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자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났다. 

상담실 문을 잠갔다. 

갑자기 군 상담실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병사내담자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충격이 왔다. 

군인은 아니었지만 평소 간부들을 동료처럼 생각했다. 

의무복무를 하는 병사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동료로. 

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게임 속 캐릭터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도저히 상담을 지속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내 상태를 군 안에 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알릴 수도 없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았다. 







충격이 커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해리가 일어날 수 있는데 내 마음이 그랬다. 

상처받은 자아를 분리해야 이곳에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충격을 안고 충격이 없는 듯 상담실을 나왔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 건물은 층마다 관리 병사가 있었다. 

마치 아파트 관리원 같은 역할로 출입을 기록한다. 

병사에게 사단으로 출장 상담을 간다고 말하고 부대를 벗어났다. 

차에 타고 정신없이 집을 향해 출발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뛰었다. 

해리된 상처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운전을 하면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차 안은 무의식적 공간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실감이 갔다. 

내 무의식에 격리된 트라우마가 튀어나왔다.           

그날 후부터 출근을 못했다. 

내 생명을 위협했던 병사와 방관한 간부가 있는 곳에 다시 갈 수 없었다. 

잠도 못 자면서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고치 속에 든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계속 생각이 돌고 돌았다. 

멈추지 못하는 생각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다.      


'간부가 왜 그랬을까?'     


알지만 모르겠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딱 이런 마음이었다.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모르게 되는 마음. 

     

'도대체 왜 그랬을까?'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질문이 떠오른다. 

울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 울었다. 

어떤 날은 침대가 뜨거운 철판처럼 느껴져서 팔짝팔짝 뛰기도 했다. 

미치고 팔짝 뛴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지금껏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내 삶이 안온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을 겪었지만 제일 큰 상처였다. 

그 간부와 겉으로는 잘 지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일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갈등한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직장 동료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언행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어떤 사람도 장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해서는 안 된다. 

내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본 가족도 놀랐다. 

여태껏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밥도 먹을 수 없고 잠도 못 자서 몸은 지쳐갔지만 정신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정신은 밤이 없는 새벽에 살고 있는 듯했다.      



군에서 그날 사건 관련 조사를 했고 모든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건 조사 후 조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후 간부들 사이에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났다. 

상담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일을 하지 않으려고 남편을 동원해 군에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돌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소문이라 근원을 밝힐 수도 없었다. 

상담을 열심히 해서 표창도 받고 그것 때문에 동료 상담관 질투도 있었다. 

그런데 소문은 제멋대로 히죽거렸다. 

동료 상담관들도 수군거렸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도널드 위니컷이 “실패한 의미 없는 울부짖음.”이 있다고 했다. 

당시 내가 그랬다. 

사건 피해자는 나였지만 보호받지 못했다. 

무늬만 피해자인 것 같고 보이지 않는 방망이로 계속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병가를 내고 요양 중이었으나 트라우마는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은 한 달, 두 달 가는데 나는 제자리에 있었다.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며 뛰는 기분이다. 

남편이 퇴직을 권했지만 용납이 안 되었다. 

내쫓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싫었다. 

내가 퇴사하면 그들이 좋아라 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는데 자신은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 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뒤집을 것만 같았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피해자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뿐이었다.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상담 과정 중 발생한 사고로 심리적 충격을 받은 상태라 정신 관련 산업재해에 해당되었다. 

내 마음이 다쳤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기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시작했다. 

나는 내담자에게 종종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거부감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진료를 받으려니 쉽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대한 기존 사회 인식에 더해서 마음을 다루는 상담사가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사실에 위축이 되었다. 

내가 마음을 다친 것은 맞지만 진단은 받고 싶지 않았다. 

진단을 받는다면 내가 너무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느껴져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산업재해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료를 받아야 했다. 

진료받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우울증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진료를 여러 차례 받는 동안 나는 의사에게 우울증이 아님을 얘기했다.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하고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산업재해는 통과가 되어 공식적으로 나는 피해자가 되었다. 

정신과 산업재해는 증명이 어려워 승인이 어렵다고 했지만 승인이 되었다. 

너무나도 명확한 사고였기 때문이다. 

상담관 중 정신과 산업재해 피해자는 내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젠장. 

내가 산업재해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군 관련 사람은 모른다. 

나는 안심이 되었고 동시에 슬펐다. 

산업재해 승인 뒤 퇴사했다. 

8년 근무했던 군상담관을 내려놓았다. 

정신과 마지막 진료가 생각난다. 

의사에게 내가 우울증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의사도 울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였다. 

비탈길을 미끄러지면서 내가 운전을 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비탈길이 끝나고 차가 멈췄을 때 우울증을 인정할 수 있었고 그날이 마지막 진료였다. 

마치 산업재해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 달려온 것만 같았다. 







퇴사 후 나는 일반 상담사가 되었다. 

마치 8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봇짐 들고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밖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겨울에 홀로 길을 나섰다. 

불안과 두려움을 넣은 봇짐은 무거웠다. 

그래도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한 줄기 햇볕 덕분이었다. 

차가운 바람 가운데 따뜻한 햇볕에 의지해 몸과 마음을 녹이며 길을 갔다. 

나는 “마음햇볕” 이란 이름의 상담센터를 열었다.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마음의 햇볕이 되고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