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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Sep 26. 2024

혹시 나는 외계인?

그럴 수도!

 엉뚱한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아닐까?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방영되기 삼십여 년 전, 나는 하굣길에 운동장 벤치에 앉아 문득 그런 생각을 처음 했다. 나른한 봄날 오후였고, 늘어지던 햇살이 얼굴을 비추던 그 순간에, 주위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무중력 상태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목을 쭉 빼고 두어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은 채 시야에 들고나는 사람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마치 그 사람들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를 중심에 두고 커다란 유리 장막이 한 겹 에워싼  미묘했다.

 마치 뇌의 회로가, 정지된 TV 화면과 같은 상태와 같달까. 이런 상태를 일반적으로 공상(空想)한다고 표현하지만, 나의 그 유리 장막은 ‘나’라는 존재를 현실과 완전히 분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또 다른 내가 멀리 떨어져 나를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증상을 겪다 보면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차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극도로 예민한 사람 중 일부는 미세한 감각 레이더망이 일상의 모든 일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기 때문에, 높은 각성 상태를 유지하려다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 지점에서 자신을 세상과 동떨어진 상태로 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코드 뽑힌 전자제품? 방전된 건전지? 한 편의 연극처럼 보이는 세상?

 어떤 표현이 독자들에게 가장 쉽게 가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그 유리 장막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에게 수시로 찾아오는데 그럴 때마다 내 상태를 인지하고 ‘알아차림’ 하는 게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부정적인 사고가 꼬리를 물 듯 이어지기 때문에 무뎌진 현실 감각을 빠르게 깨고 나와야 한다. 나는 글쓰기와 책 읽기 그리고 요가 수련을 그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으면 집안의 모든 창문을 닫고 눈을 감고 바닥에 가만히 누워 적지 않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며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정신과 육체적으로 완전한 ‘쉼표’의 상태를 만들곤 한다. 나만의 셀프 심폐소생술인 셈이다. 이렇게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의 20~30대를 불쏘시개로 썼다. 선 자리에서 돌아봐야 지나온 발자국이 보이는 것처럼 지나고 보니 나의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찬란했던 시간이 타고 남은 잿더미같이 느껴져 한동안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으니 언젠가 그 검은 잿더미가 자양분이 될 날이 있으리라, 나를 달랬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람인 것 같아.’

 대학교 1학년, 스무 살에 처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순간순간 자각하지 못했을 뿐,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늘 혼란스럽고 불편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우관계가 좋지 않았다거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면 깊숙이 잠재된 물음표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개인으로 존재해도 사회를 이루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 하면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확인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사회적, 비사회적 그 두 부류의 어느 군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에서 무게 추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데 크게 이질감이 없지만, 내면적으로는 비사회성의 크기가 큰 듯하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 지인이 같은 자리가 아니더라도 한 입으로 두말하기를 시전하는 상황을 보면 꽤 신경이 거슬린다. 두말하는 상대가 내가 아니어도 말이다. 삶을 살다 보면 말이나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하거나 상식선을 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 부분을 소화하지 못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치충돌을 겪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바라보는 인간의 사회적 기준과 잣대가 너무 높고 명확해서 상황에 따른 사람의 다면성을 유연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 간극 좁히기를 실패한 데서 오는 회의감일 수도 있겠다. ~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식의 굉장히 피곤한 강박 공식을 대입시키는 탓도 있다. 나도 나의 이런 면이 힘들 때가 많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복잡하고 힘든 세상,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어가면 얼마나 좋니? 라고, 지쳐 탈진한 상태의 또 다른 내가 내게 묻기도 한다.



 모두가 ‘예’라고 하는데 ‘아니’라고 하는 용기, 라는 90년대 모 증권회사의 TV 광고 문구가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창의적인 생각과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자신감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문구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그 광고를 보면서 옳은 것에 대해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 ‘예’라고 하는 사람이 그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 ‘예’라고 주장한 사람의 말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몰아붙인다면 ‘아닌 것’이 되지 않을까?

 내가 ‘예’라고 말한 것에 논의조차 없이 ‘아니’라고 치부되는 거론하기도 애매한 많은 상황에, 나는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있었나. 더욱이 그 ‘아니’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경우, 그 속의 ‘나’는 종국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 건지 가치판단의 기준이 불명확해지는 혼란을 겪는다. 특히 감정과 생각이 복잡한 회로로 설정된 HSP인 경우, 그 혼란의 강도는 더 크다. 물론 모든 HSP가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 없다. 같은 HSP라도 성향이 다르면 동일한 상황을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전적인 요소가 있어도 형제 모두 HSP의 기질을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내가 예민하고 민감하게 느끼는 부분을 내 동생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동생의 경우, 외부에서 들리는 소음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른 감각은 좀 무딘 편이다.

 HSP는 자신의 감정과 감각 회로는 물론, 타인에게도 미세한 레이더망 구축하기 때문에, 필터 없이 들어오는 그 모든 정보를 내면에서 처리하느라 점점 혼자 지쳐간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타인과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이타적인 HSP라면 자기 주체성이 박약해진다. 그러므로 자신이 HSP 기질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길의 끝이 절벽인 줄도 모르고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의 이질감을 업고 ‘과도하게 열심히’ 달린다. 그 끝에서라도 멈출 수 있는 힘을 가지는 법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법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키울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오롯이 자신만 할 수 있다.



 느긋한 주말 오후, 가을에 접어든 기색을 내비치는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훔쳤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귀가 멍해지면서 눈에 들어온 주위 풍경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난데없이 블록으로 조립해 놓은 장난감 세계에 내가 뚝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 타인과 사고(思考) 체계가 다르게 설정된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녹색으로 바뀐 신호등으로 주의를 돌려 힘차게 길을 건넜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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