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한 살 아래, 그러니까 정확히는 15개월 차이 나는 남동생이 한 명 있다. 한 배에서 나온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안 닮았다. 어릴 때는 나보다 몸집도 키도 한참이나 작았는데 고등학교 올라갈 무렵부터는 176cm의 내 키와 비등비등해졌다. 내 키는 늘 컸다. 운동장에서 줄을 설 때도, 교실에서도 내 자리는 항상 맨 뒤였다. 반면에 내 동생은 늘 앞자리를 지키는 조그마한 꼬맹이였는데 인중에 수염도 거뭇거뭇하고 축구선수같이 두꺼운 허벅지에, 몸통도 제법 두툼하고 단단한 살집이 있는 사내로 자랐다.
보통 한 살 터울 동생이면 많이 시샘한다고들 하는데, 엄마는 내가 동생을 물고 빨았단다. 뭐 그 정도로 동생을 잘 보살폈다는 말이겠지 했다. 그런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동생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던 친구들은 가끔 물었다.
"너 동생이랑 나이 차이가 꽤 난다고 했지?"
"아니. 한 살 차인데?"
"진짜? 난 진짜 나이 어린 동생이 있는 줄 알았어. 자식 키우는 것도 아니고 유난이다 유난이야."
낮에 집에 있었던 기억이 없을 정도로 엄마는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절의 많은 딸들이 그러했듯, 엄마가 없는 시간의 딸들은 동생이나 오빠에게 엄마의 역할을 대신했다. 엄마가 해 놓은 반찬을 꺼내서 동생의 밥을 챙겨주는 일부터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는 동생 숙제 봐주기, 엄마가 퇴근하기 전까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기, 학교 끝날 때 동생 데리고 같이 집에 오면서 군것질하기 등등… 어린 시절의 많은 것을 함께하며 붙어 다녔다. 더 자세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은 이유로 동생에게 ‘내가 인마, 내가 너를 업어 키웠어’와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기에는 어쩐지 좀 부끄럽다.
내 뒤꽁무니를 잘 따라다니던 동생은 머리가 굵어지면서 없던 말수가 더 없어졌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아예 입에 지퍼를 달았다. 나는 2년제 전문대학에 다녔고, 남편이 없는 엄마는 여전히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을 해야 했으므로 같은 집에 사는 우리 세 식구는 의식주 중에서 ‘식’과 ‘주’만 같이 공유할 뿐 따로 놀았다.
하지만 여전히 먹고살기 바쁜 엄마를 대신한, 나의 엄마 역할은 동생과 내가 서른이 넘도록 계속됐다. 군대에서 배워 온 담배를 피우는 동생의 모습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퇴근하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휘청대고 들어오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하고, 자정이 넘도록 소식이 없으면 혹시 사고는 나지 않았나 싶어 연락하고 집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동생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꼬맹이로 두고 싶었나 보다.
엄마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나는 정말 별꼴이 반쪽이었다. 엄마의 속뜻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별스럽게도 군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동생한테 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내가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면 나는 정말 극성스러운 엄마가 될 게 분명했다.
드라마에도 나올까 말까 하는 다정한 말투에, 누나를 보호하는 그런 오빠 같은 스타일의 남동생은 안타깝게도 나의 현실에는 없었다. 여전히 동생은 입에 지퍼를 채운 채로 엄마와 나의 속을 태웠고, 말투는 무뚝뚝했고, 한 살 차이는 우스운 듯 버릇없이 굴 때도 많았다. 엄마는 늘 저놈이 커서 제 잇속이나 잘 챙기면서 살까 싶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에 코웃음을 쳤다. 왜냐면 동생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제 잇속을 챙기는 것에 더해 나를 호구로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먼저 퇴근해 온 날이면 나의 퇴근 시간을 확인해 군것질거리 배달 기사로 만들었고, 주말이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삼시세끼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식당 아줌마로 만들거나 1년에 한 번인 생일을 명목으로 고가의 선물 리스트를 들이밀 줄도 알았으며 이런 모습도 있었나 싶을 살가움을 장착해 나의 마음을 움직여 필요한 것을 얻어 낼 줄도 알았다. 엄마는 알기 힘든, 세상 치밀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나는 겉으로는 ‘내가 무슨 지 꼬붕이야?’하면서도 동생이 나에게 뭘 해달라고 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잇속 계산을 하자면 분명 내가 손해 보는 장사인데 그 손해가 좋았다.
동생은 자신의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일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대답은 늘 사실에 기반한 단답형일 뿐 어떤 감정도 섞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굳이 동생의 속내를 묻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동생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곁에 없었던 엄마에게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엄마에게 먹고 싶은 걸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하기도 하고 싶은…… 무언가 해달라고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마음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하고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해지는 일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결혼하면서 맏이로 살아 온 나에게, 남편이자 6살 연상의 오빠가 생겼다. 나는 남편에게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하기도 했고, 먹고 싶은 걸 해달라고도 했다. 동생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게 꽤 괜찮은 기분이 든다는 것을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동생은 누나를 데려갈 남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대 놓고 위아래도 훑어가며 남편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었다.
지금도 동생은 단답형의 문자나 전화로 나를‘꼬붕’으로 만들지만 내 동생 한정, 호구 누나로 사는 것이 아직까지는……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