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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네잎 Oct 05. 2021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시

-  『상뻬의 어린 시절』에서

L  겨우 여섯 살짜리 꼬마였을 때 레이 벤투라를 들었단 말이죠?

S  우연히 들었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매혹적이었어요.

L 그 음악 덕분에 우울한 세계를 잊을 수 있었다?

S 하여간 라디오 덕분에 클래식이건 아니건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연극도 좋아하게 되었어요. 

L  라디오는 어떻게 들었죠?

S 집에 라디오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고장이 나서 낙담했죠. 그러다가 부모님이 대판 싸우시던 어느 날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좌우지간 팔꿈치로 쳤는지, 라디오를 떨어뜨렸어요. 그랬더니 다시 작동하지 뭡니까. 아, 그때 그 행복감을 상상도 못할 거예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머리 위로 의자를 던지거나 말거나 난 딱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아, 라디오가 있다. 라디오가 있어, 라디오가 다시 작동한다>라고요. 그래요. 라디오를 정말 좋아했어요. 아주아주 좋아했어요.      


- 장 자끄 상뻬, 『상뻬의 어린 시절』, 미메시스, 2014, P55.          




안개,  관계




1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키스

그 통정의 순간

정선으로 가는 38번 도로    


2

안개는 시야를 가려놓고, 곳곳에 귀를 심는다 도로변 천막 휴게소 귀퉁이에 매달린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커피가 따뜻하다 오빠가 학교에 간 사이 마루에 앉아 라디오의 나사를 하나하나 빼내었다 아주아주 작은 사람들이 궁금했다 지금은 당신을 뜯어보고 싶다 언니 방에 걸린 거울, 그 거울의 뒤가 궁금했다 책상에 올라가 거울의 뒤를 보았다 지금은 당신의 이면이 보고 싶다     


3.

산이 입술을 열고 다가온다

귀는 어떤 표정을 짓나

계곡의 물숨 소리가 산사로 오른다

나무들은 구멍을 만들어 새처럼 운다

눈동자는 어떤 소리를 만드나

물푸레나무 몸을 틀어 안개를 털어낸다

잎들은 안개의 목줄을 사각사각 갉아 댄다

산길에 손과  발을 푹푹 심는 동안

등뼈를 따라 물관이 흘러넘친다

손끝에서 가장 먼 등

보이는 은밀함은 어떻게 가리나

생각을 벗어 층층나무 가지에 건다


- 김네잎, <안개,  관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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