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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네잎 Sep 29. 2021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시

-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몸을 굽혀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일어나야 할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내 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진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비의 날개가 도로 접히더니 쪼그라들고 말았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오는 과정은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했고, 날개를 펴는 과정은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온통 구겨진 채 집을 나서게 강요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16, p177.          




흘러내리는 포물선




넌 난생이잖니, 당신이 말해 놓고 가자 난 알속에 갇히고 말았어요


정점에, 나는 정교하게 달을 그려 넣지요 달이 자라기 시작하는 환절기에는 비가 자주 왔어요 우산을 잃어버리기 좋은 날들이었고 창문은 열리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무지개가 거꾸로 떴더구나, 당신은 자라는 달을 외면하며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꼭짓점에 손을 얹으면 먼 곳의 당신은 흐물거렸어요 여기의 아침과 거기의 아침은 서로 적막하고 한 생과 한 생에 이르는 거리가 같은 체온의 자취, 당신에게 배제된 달은 나의 노래, 그런데 나는 왜 이 노래가 두려워질까요?


머리칼을 자르러 가요 햇살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궤적을 따라서 다녀온 눈빛이에요 아직 난 미숙이에요 미약한 껍질조차 없는, 당신이 알 하나 품은 게 잘못이지요 깨지고 나서 울게 되는 건 매번 당신이잖아요


- 김네잎,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 천년의시작,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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