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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네잎 Sep 14. 2021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시

-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어느 화창한 여름날 외삼촌은 무밭에서 김을 매다가 문득 떠올렸다. 누이는, 그러니까 내 엄마는, 무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것을. 그는 통조림 따개로 유골함을 연 뒤 무밭에 엄마의 재를 뿌렸고, 나중에 우리는 그 무를 맛있게 먹었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2018, p25.




이어지는 패키지




첫 목적지는 멀고 멀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투어버스는 번번이 툴툴거렸다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분명 오래전에 순례자들은 잠들었는데

성지와 유적지의 차이는 알 수 없고

그들의 태도와 의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린다

문을 열었다 손목은 보이지 않고

CCTV 같은 눈동자만 있다

무엇을 끝까지 목격하려는 걸까

운전석에선 핸들을 휘감은 물뱀 히드라가

아홉 개의 머리를 들어 갑자기 나를 바라본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는데

이국의 언어가 쏟아진다

라디오에선 클로징 멘트가 흘러나온다

아마존 노란점거북이의 눈물에서

나트륨을 섭취하는 나비의 사연과

거북이의 눈 가장자리에 앉을 때마다

팔랑거리는 나비의 느린 슬픔을 아느냐고 묻는다

내가 훌쩍훌쩍 운다

창문 옆에선 여행자란 여행자는 전부 살아나서

자신의 관을 메고 나를 본다

빛이 모두 새 나간 버스 안은 죽음처럼 어둡다

가도 가도 음울한 장면들

문득 버스가 요람으로 변해 있다 



- 김네잎, 『파란』,  202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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