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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네잎 Oct 28. 2021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시

-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에서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게게 

    

한 가지 믿음에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믿음이 나를 으깨버리고 나를-벌거벗은 것처럼-혼자 버려두는데.

제가 느끼는 것은 반항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고 그저 무관심입니다. 어쩌면 이건 결국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 테지요-사실 저는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오직 선생님의 우정밖에는-그또한.     


- 알베르 카뮈 · 장 그르니에,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책세상, 2014, p23.       

   



복서  



                  

몸과 몸은 간극이 필요하다

잠시 부둥켜안는 건

서로의 가장 깊은 호흡을 가늠해 보는 겨를 

공격과 방어의 격돌에는 공시성을 갖는다

링의 로프를 등지고 

이곳은 난간과 난간이 만나는 지점

은신처가 될 수 없는 벼랑

쏟아지는 잽, 잽, 잽 

달아나는 스텝, 스텝, 스텝

주먹을 펴도 주먹인데 코치는 

날린 주먹을 되돌아오게 하려면 손의 힘을 빼라고 한다

울지 못해서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못해서 주먹을 쥐고 달아났다

달아나는 반경까지 왜 하필 점점 좁아졌던 걸까

사각死角 밖으로 벗어나 본 적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이해한다

3분만 반복해서 버티면 된다 

부러지지 않게 파열되지 않게

정면이 계속 나를 고집하니

훅, 치고 빠지면서 살짝 틈을 보여 준다

틈을 안고 자라난 것들은 

대개 굳은살이 박여서

허기의 무게를 견디는 법을 잘 안다

어퍼컷,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려던* 계획이 전부 빗나간다 

턱을 못 넘고 언제나 턱 앞에서 고꾸라졌으니

잠깐의 클린치는 

서로의 가장 거친 호흡을 가늠하는 순간이다

피범벅이 된 마우스피스가 굴러간다

나를 위해 던져질 수건조차 없으니

쓰러진 채 씩, 웃는다    

 

*1964년 2월 25일, ‘무하마드 알리’가 세계 챔피언 경기 시작 전 기자회견에서 상대 선수인 ‘리스턴’에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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